비망록

8화

9,280자

하루가 지나고 찾아온 후계자 공표 당일. 호수의 위쪽으로 특이한 공간이 생겨났다. 호수의 중앙에는 높게 솟은 기둥이 하나 있는데, 그 기둥을 중심축 삼아 떠 있는 땅이 눈에 들어왔다. 밤하늘에 태양이 떠 있는 것은 익숙해졌지만, 중력을 무시하고 떠다니는 땅덩어리를 보니 놀라운 감정이 들었다. 그동안은 없던 것이니 더더욱 그런 느낌이었다.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을 벌리고 서 있으니, 옆에서 웃음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웃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트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아, 정말 부끄럽네. 웃으라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웃으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그를 가만히 노려보며 팔을 툭툭 쳤지만, 그는 한참을 더 웃은 뒤에야 겨우 진정했다. 세트는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뇌물을 건네듯 작은 열매를 주었는데, 평소에 먹던 맛 그대로 달콤해서 기분이 풀리고 말았다. 맛있는 것에 기분이 풀리는 나도 단순하지만, 이런 나를 파악하고 굳이 열매를 가져온 세트도 참 대단한 것 같다.

 

나 혼자서는 위쪽의 땅에 갈 수 없어, 세트에게 반쯤 안긴 자세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나를 둘러메려 했지만, 열심히 고개를 저으며 거부하니 내린 선택인 것 같다. 그는 허리를 숙여 높이를 맞춘 뒤, 팔을 뻗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대로 이동했다가는 내 허리가 꺾일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어서,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허리를 엉거주춤하게 껴안았다. 그냥 볼 때는 몰랐는데 생각보다 두텁고 탄탄한 허리였다. 음, 갑옷 때문인가. 하지만 시선을 옮겨 그의 상완이두근을 보니… 음… 그가 갑옷을 입고 있어서 다행인 것 같다. 나처럼 이런 천 쪼가리만 입고 있었다면 상당히 민망한 장면이 연출됐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조금 민망하긴 하다. 허리에 맞닿은 팔이 너무 단단하고 뜨거워서, 그, 흔한 로맨스물에서 나오는 문장들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애써 생각을 돌리며 심호흡을 하니, 세트는 내가 긴장했다고 여기는 것인지 뒷머리를 어설프게 토닥이며 괜찮다는 말을 꺼냈다. …아니, 허공을 날아가야 해서 긴장한 게 아니라 너 때문에 긴장한 건데. 나 이런 것에 면역 없단 말이야. 눈을 질끈 감고, 얼른 이동하라고 말했다. 세트는 내 머리를 조금 더 토닥여주고는 무척 강한 힘으로 뛰어올랐다. 땅도 움푹 패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묵직한 힘이었다. 안전장치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놀이기구를 타는 기분이라, 숨도 멈춘 채로 팔에 힘을 주었다. 그의 탄탄한 몸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내 생존이 우선이었다.

 

공기 같은 힘 없는 물체가 아닌 단단한 땅이 발에 닿았다. 나는 안심하며 눈을 뜬 뒤 주변을 살폈다. 이 땅에는 벌써 많은 신이 모여있었다. 아는 면상도 있었고,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아, 아는 면상은 당연하게도 엑스트라 신들이다. 재수 없는 놈들. 그들은 학교 축제를 처음 즐기는 신입생마냥 들뜬 낯이었다. 하긴, 후계자가 나오는 건 드문 일이니까. 운 나쁜 신은 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볼 수 없는 의식일 테니, 그들의 들뜸도 이해는 간다. …그래도 재수 없는 건 여전하지만 말이다.

 

조금 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특이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호루스와 샤도 여기서는 보이지 않았다. 신들이 바글바글한 저 중앙에 있을 것 같은데 내 힘으로는 무리니까… 세트를 방패 삼아 뚫고 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세트에게 말을 걸려 했는데, 생각보다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당황하고 말았다. 아직도 안겨 있는 자세를 유지하는 중이었구나. 그냥 혼자 서 있을 때처럼 자연스러워서,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움찔하며 그의 팔을 쿡 찔렀고, 그는 내 속마음을 읽은 듯 빠르게 팔을 풀었다. 온기가 사라지니 조금 싸늘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이는 분명 착각일 것이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세트의 팔을 붙잡은 뒤, 무턱대고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세트는 가만히 따라오다가, 신들이 많아지자 자신이 앞서 나가며 길을 텄다. 나는 그의 등에 딱 달라붙은 채 편안히 걸음을 옮겼다.

 

[아, 저기 호루스랑 샤 있다!]

 

세트의 등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자, 저 멀리에서 익숙한 인영 둘이 보이는 듯했다. 짙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커다란 신과 그의 허리춤에 겨우 올 만큼 작고 하얀 신. 무척 오랜만에 보는 모습에 반가움이 가득 들었다. 세트를 재촉하며 서둘러 그들에게 향했고, 몇 주가 지났음에도 변함없는 친밀감을 표현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샤,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준비는 잘했고?]

 

“응, 오랜만이야. 준비는 잘했지만, 네가 없어 허전했어.”

 

[아이고, 어떡해. 우리 샤가 날 많이 보고 싶어 했구나. 의식이 끝나면, 바쁜 일이 끝나면 다시 같이 놀자!]

 

샤는 예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을 타고 휘날리는 그의 머리카락이 마치 연한 수묵화 같아 감동적이었다. 가슴팍을 움켜쥐며 샤의 귀여움에 대해 한참 토로하다 보니, 어느덧 의식을 치를 시간이었다. 할 말을 다 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의식이 끝난 뒤 마음껏 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다.

 

호루스와 샤는 조금 높이 위치하는 제단에 올랐다. 제단에는 호수처럼 투명한 물이 얕게 고여 있었고, 그 위에는 잘게 부서진 연꽃잎이 띄워져 있었다. 그들은 연꽃잎을 바라보며 동일한 주문을 읊었다. 여전히 들리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와 파장이었다. 다른 신들은 그를 들으며 자리를 옮겼다. 세트와 같은 고위 신들은 제단을 둘러싼 형태로 곧게 섰고, 다른 신들은 제단에서 조금 먼 곳에 원형을 그리며 모였다.

 

나는 그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그저 애매한 위치에 서 있었다. 세트는 의식이 시작되기 전까지도 나를 걱정하며, 차라리 함께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기운 다루는 것이 미숙한 내가 제단 근처에 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마음은 편하겠지만, 샤에게 조금의 악영향도 가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 결과, 나는 신들처럼 무리에 섞여 원형을 이루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서 있게 되었다. 혼자 서 있는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신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결국 의식에 집중하느라 바빠 이야기를 더 나누지는 못했다.

 

조금 뻘쭘한 기분이었다. 신들에게서 배척당한다는 사실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 같아 씁쓸하기도 했고, 신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어색하기도 했다. 그래도 저 무리에 섞여 있지 않아 다행인 점이 있다. 호루스와 샤가 서 있는 제단이 꽤 잘 보인다는 것이다. 만약 신들 사이에 있었다면, 180이 넘는 거인들 때문에 제단은커녕 앞도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면에선 신들과 떨어지는 게 더 이득이었다. …여전히 씁쓸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다시 제단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호루스는 자신의 카를 꺼내어 물에 담그는 중이었다. 투명하던 수면 위로 푸른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이 아니라 기름을 만난 것처럼 빠른 속도로 번졌고, 떠다니던 연꽃 조각들은 불길에 먹혀 스러졌다. 그 모습을 진중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호루스는 다시 알 수 없는 주문을 선창했고, 제단 밑의 고위 신들은 같은 단어를 후창했다. 뒤이어 일반 신들도 같은 단어를 되뇌었는데, 그 광경은 마치 오르가눔을 합창하는 성가대와도 같았다. 모든 신이 하나가 되어 노래 부르는 것 같았다. 왜 모든 신이 의식에 참여해야 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단어들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이곳의 신이 아니니까, 저들과 교류할 수 없는 존재이니까. 그들의 의식은 나와 관계없는 행사였다. 그들은 이곳의 주인이고, 나는 잠시 들렀을 뿐인 손님이다. 그들은 이곳에 사는 주민이고, 나는 다른 곳에 살던 외지인에 불과하다. 그들과 나는 그런 관계였다.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거대한 흐름 속에서 오직 나만이 거리를 둔 채 침묵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기에 가장 먼저 이변을 알아차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단에서 가장 먼 곳에 서 있는 신이 기괴하게 몸을 비트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제단만 올려다보며 노래를 부르는 신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저 괴기한 장면을 알려야 한다고,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으나 내 입에선 그 어떠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의식 속 노래만 허용된 것처럼, 다른 소리는 그 무엇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에 있는 신들은 모두가 몸을 비틀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그들을 집어삼키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새까매졌고, 이성을 잃었으며, 짐승의 울음을 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분하며 주변에 있는 신을 물어뜯으려 들었다. 공격당한 신들은 경악하며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그 어떤 소리도 퍼지지 못했다. 그들은 침묵 속에 죽어갔다.

 

신들은 노랫소리가 확연히 작아졌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이변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그림자에 맞서기 위해 대형에서 이탈했고, 여유를 잃은 채 노래를 멈추었다. 마지막 후창이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그제야 고위 신들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절반에 가까운 수가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고위 신들은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제단을 방어했다. 한번 시작한 의식은 중간에 멈출 수 없기에,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의식을 유지하고, 후계자를 지키고, 종래에는 ‘신들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현재 살아 숨 쉬는 신들을 저버렸다.

 

[미친 거 아냐? 왜 제단 근처에서 안 움직여? 지금 저기 엑스트라 신들이 다 죽어가는데? 죄다 좀비처럼 변하고 있는데? 왜, 왜 가장 강한 놈들이 안 나서는 거야?]

 

어느샌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혼란에 빠져있었다. 의식을 진행하고 있는 호루스와 샤는 공격에 취약하니, 그들을 보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건 몇 명만 있어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나? 고위 신 중 몇 명은 저 약한 신들을 보호해야 하는 거 아닌가? 대형을 유지해야 한다면, 그들의 능력을 사용하면 되지 않나. 원거리 능력자가 한둘이 아닌데, 왜 아무도 나서지 않는 걸까.

 

[와씨, 깜짝이야.]

 

본능적으로 지팡이를 소환한 뒤 휘둘렀다. 그림자들은 벌써 내 주변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상당히 불길한 징조였다. 일반 신들이 그만큼 많이 죽었다는 사실은 둘째치고, 일단 내가 살아남을 수는 있을까? 세트에게 호신술을 배우긴 했지만, 그건 다인전에 쓸 만한 건 아니었는데. …지금 주변에 있는 놈들은 최소한 열몇 명이란 말이야. 17대 1로 싸우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잔뜩 한탄하며 열심히 공격을 피해 다녔다. 다행히도 그림자의 공격은 단순무식해서, 그 패턴을 파악하기도 쉬운 편이었다. 대충… 오른쪽, 왼쪽, 위, 왼쪽 같은 느낌이었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오거나 반대로 넓게 휘두르는 공격이 대부분이었고, 그 정도는 몸을 조금 움직이며 지팡이로 쳐내기만 해도 되는 수준이었다. 지칠 때도 매번 세트와 훈련하기를 잘한 것 같다. 내 생명을 살렸네.

 

그림자의 머리로 추정되는 부위를 지팡이로 여러 번 후려쳤다. 대략 서너 번 타격하면 쓰러지는 것 같았다. …열몇 명이니까 최소한 서른 몇 번을 때려야 하는 셈이지만, 이 몸으로 체력의 한계를 느낀 적은 별로 없으니 괜찮을 것이다. 주변에 있던 그림자를 처리하고 나니, 저것들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차갑고 소름 끼치는 감각은 셰우트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종류였다. 저 신들은 셰우트에게 먹혀서 조종당하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인 카를 빼앗긴 채, 똑같은 셰우트가 되어 다른 신의 영혼을 탐하게 된 것이다.

 

[진짜 짜증 난다. 셰우트는 원래 주인 없는 신전에서만 나온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왜 신들이 잡아먹힌 거야?]

 

잠시 숨을 돌리려 했지만, 새로이 셰우트가 되어 기운 넘치는 놈들이 다가오는 바람에 화가 올라왔다. 이를 악물며 고위 신들이 있는 쪽으로 길을 뚫기로 했다. 나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고, 저 약한 신들도 대부분 죽어버린 것 같으니 너희가 상대해라. 너희한테 몰고 갈 거다. 약 수십 명 정도의 그림자를 이끌고 달려가니, 아직 잘 버티고 있던 일반 신들이 넋 놓고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당신들 앞을 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지금 그림자가 당신 물려고 하는데요.

 

“움직여, 머저리들아! 시커먼 그림자가 되고 싶냐!”

 

앗,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었다. 산발이 된 주황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높이 날아오른… 응? 날아올랐다고? 정말 놀랍게도, 그는 고위 신들의 대형에서 이탈하여 그림자들을 찢어발기는 중이었다. …이탈해도 되는 거였으면 진작 이탈해서 공격하면 어디가 덧나나. 불만이 올라왔지만, 아직도 안 움직이는 놈들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며 꾹 참았다.

 

“너희가 그토록 탐내던 성물을 잔뜩 얻을 기회인데 뭣들 하냐! 얼른 싸워! 다 쥐어패라고!”

 

세크메트는 평소의 고상한 모습을 버린 채 고래고래 소리쳤다. 어찌나 목청이 좋은지, 열 명에 가까운 고위 신들의 노래가 묻힐 정도였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신들은 버프라도 받은 듯 힘차게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림자들은 꽤 빠른 속도로 처리되기 시작했다. …나를 따라오던 그림자들만 빼고 말이다.

 

[세트! 나 좀 살려줘!]

 

세트는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것처럼 창을 꺼내어 움켜쥐었지만, 의식이 신경 쓰이는 듯 제단을 흘깃거렸다. 그의 입은 여전히 노래를 외는 중이었다. 조금만 버텨달라는 듯 손짓하는 것을 보았지만, 글쎄, 내가 이 상황에서 버틸 수 있을까. 뒤쪽에서는 여전히 소름 끼치는 놈들이 달려오고 있었고, 앞쪽에서도 고위 신의 기세에 밀린 그림자들이 만만한 나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사면초가였다. 하는 수 없이 그나마 뚫려 있는 옆쪽으로 달렸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제 날 따라오는 그림자는 백 명쯤 되는 것 같았다. …여기서 빠져나가기만 해봐라. 제때 안 도와준 고위 신들 다 뒤집어엎을 거야.

 

앞에서 손을 뻗어오는 그림자의 머리를 내리찍고, 땅바닥에 쓰러진 놈을 밟고 지나가며 도망쳤다. 셰우트를 압축하면 성물을 만들 수 있다지만, 이렇게 많은 놈이 쫓아오는 와중에 그런 시도를 했다가는 골로 갈 것이다. 애초에 셰우트를 압축하는 방법도 모르지만 말이다. 슬슬 아파오는 종아리를 무시하기 위해 불필요한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림자들의 공격을 계산하고 피하기엔 수가 너무 많아졌고, 그냥 본능에 맡기는 게 유리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기도 했다. 옆에서 들어오는 그림자를 지팡이로 쳐내고, 발목을 잡으려 드는 그림자는 짓밟아버렸다.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느라 허리를 숙이기도 했는데…. 그와 동시에 목에 감겨 있던 성물이 끊어지고 말았다.

 

문득 세트의 말이 떠올랐다. 이 성물은 급하게 만든 것이라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지금 상황에서는 매우 불길한 그 말. 셰우트를 막아주던 성물이 끊어진 지금, 나는 셰우트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세트의 신전처럼 몇 안 되는 양도 아니고, 신의 형태를 취한 백 명의 셰우트라니. 이를 자각하는 순간부터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죽음의 기운이 몰려왔다. 발끝에서부터 냉기가 타고 올라왔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얼음물에 뛰어든 것처럼 심장이 확 굳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버텨보기 위해 그나마 따뜻한 불꽃 같은 호루스의 기운을 꺼냈다. 푸른 불꽃은 잠시나마 체온을 유지해주었지만, 그림자들이 낄낄 웃으며 손을 뻗자 그대로 사그라지고 말았다. 아니, 오히려 그림자들에게 빨려 들어간 느낌이었다. 더 이상 호루스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고, 내가 들고 있던 지팡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카를 매개로 모인 성물은, 카가 사라지면 셰우트로 돌아간다. 내가 들고 있는 건 이제 성물이 아닌 셰우트였다. 그 판단이 들자마자 지팡이를 내던졌고, 땅에 떨어진 지팡이는 산산조각이 난 뒤 작은 셰우트 무리가 되어 나를 쫓아왔다. 이젠 한계였다. 앞길을 막는 그림자를 쳐낼 방도가 없었다. 거리가 있는 상태에서도 그들의 한기는 내 영혼을 먹어치우는 중이었다. 정말로 죽는 건가? 검고 차가운 것이 내 목을 조르려 할 때였다. 주변에 있던 그림자들이 황금빛 모래에 파묻혔고, 뜨거운 것이 나를 품 안으로 당겼다.

 

“…버텨줘서 고맙다.”

 

그는 죄책감 어린 눈빛으로 나를 안아 올렸다. 내 영혼을 살피듯 얼굴을 훑고는, 거세지만 부드러운 힘으로 재차 끌어안았다. 그의 숨이 어깨 위로 퍼져나갔다.

 

[너무 늦었어. 진짜, 진짜 무서웠다고. 또 죽을 뻔했어.]

 

“미안하다.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고 했는데, 약속을 못 지켰어.”

 

[맞아, 너 나빴어…. 이런 극적인 생존보단 평안하고 안락한 게 좋단 말이야.]

 

조금 긴장이 풀려, 투덜거리듯 말하며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평소라면 뭐라 했을 세트이지만, 오늘은 그의 잘못을 아는 듯 얌전히 받아들였다. 방금의 공포를 잊으려고 일부러 장난친다는 것을 아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묘하게 눈치가 빨랐으니 말이다.

 

겨우 안심하며 그림자들이 묻히는 걸 지켜보았다. 그것들은 최후의 발악을 하듯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와 칠판 긁는 소리, 천둥소리, 거대한 폭발이 일어날 때의 소리 등을 섞어놓은 느낌이었다. 무척 끔찍했고, 기괴했다. 또한, 그 소리와 동시에 사방으로 붉은 실타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림자들의 목에는 실이 감겨 있었는데, 그 실은 한데로 뭉치려 들었다. 실타래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붉은 실로 감긴 제단이 보였다. 투명하게 푸른 불꽃을 옮기던 물은 오염된 상태였다. 그 앞에 선 샤는 의식의 마지막을 위해 제단의 물을 두 손에 가득 담았고…….

 

[안 돼!]

 

어디서 난 힘인지 알 수 없지만, 경악한 나는 세트를 밀치고 제단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물을 떠 마신 샤에게 붉은 실타래가 빨려 들어갔다. 샤는 고통스러운 듯 비틀거리며 피를 토했다. 안 돼, 안 된다. 저것들이 전부 흡수되면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바닥을 기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몇몇 신들은 안심했지만, 붉은 실이 보이는 나로선 전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 그림자들이 전부 샤에게 향했다는 거잖아. 하나만 있어도 괴로운데, 그 수많은 것들을 전부 다 받아들이고 있다는 거잖아. 나는 디레의 행복을 바라며 그의 불행을 최대한 거두어가고 싶었어. 이런 장면은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다고.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주위를 훑었다. 아직 흡수되지 않은 것, 가장 붉고 굵은 실 가닥. 무척 거대한 것이 허공에서 샤에게로 연결된 상태였다. 저걸 삼켜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샤에게 흘러 들어가게 놔두면 안 된다. 저걸 내가 가져가야, 그래야 무언가 해결될 것이다. 서둘러 달려가 실을 확 잡아당겼다. 한 가닥인 줄 알았던 실이 사실은 수천 가닥이었음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샤에게 연결되었던 것들보다도 많은 수의 가닥이 사방을 메꾸었다. 계속, 계속 퍼져나가며 나에게 닿는 모든 빛을 차단했다.

 

문득 붉은 것이 보였다. 암흑 속에서 검은 것들이 꿈틀거렸다. 냉기와 독기를 품은 것들이 모여 하나의 형상을 이루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것은 거대한 뱀이었다. 검은 뱀은 똬리를 틀며 화를 내듯 쉭쉭 소리를 냈다.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 속 검은 동공이 확장되어 나를 집어삼켰다. 그대로 암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