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고통스러웠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귓가에는 이명이 맴돌고, 속은 가시를 삼킨 듯 따끔거렸다. 혈관을 타고 불길이 번져나갔다. 알 수 없는 것에 의해 숨이 틀어막히고, 목이 옥죄었다. 머리의 안쪽으로 혈액이 몰려 뭉쳐지고, 또 뭉쳐져 거대해지는 것 같았다. 뇌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내 목숨이 바스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억겁의 세월과도 같았다. 인간의 몸이 화산에 산 채로 내던져졌을 때, 인간은 어떤 고통을 느낄까. 죽여달라고 빌까, 혹은 살려달라고 빌까. 만약 그 상태에서 무한히 재생하여 죽지 않는다면, 그러나 결코 그곳에서 탈출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인간은 산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나는 이 불구덩이에서 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너무 잔인한 처사이지 않은가. 언제 끝날지 모를 고통, 언젠간 괜찮아질지도 모른다는 기약 없는 희망. 인간이 버틸 수 없는 가혹한 환경이었다. 나는, 나는 아직 인간이었기에, 그것을 버틸 수 없었다. 인간이니까. 약하디약한 인간이니까.
그래서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죽기 위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나를 부정했다. 나는 인간이었지만, 동시에 인간이 아니어야 했다.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채 인간임을 부정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잃을 것 같았다. 나를 잊을 것 같았다.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내 육체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아니, 애당초 감각이 없었지만. 그저 상상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호흡이 바뀌고, 손끝이 떨리고, 눈꺼풀이 열리는 것을. 그리하여 세상을 직시하듯. 존재하지 않는 나를 재구성했다. 고통에 불살라진 기억을 끌어모았다. 조각난 그릇을 끼워 맞췄다. 금이 간 것은 바꿀 수 없지만, 적어도 원래의 기능은 할 수 있도록. 나는 나를 만들었다.
신들의 감각은 이런 것일까? 연꽃에서 나와 스스로를 명명한 뒤 자아를 찾는 그들은 항상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그동안 나는 맞지 않는 그릇에 나를 끼워 맞추고 있었다. 나를 알지 못하는 자에 의해 만들어진 육신에 심어져, 그것의 모난 부분에 피 흘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이었는지 말이다. 바로 지금, 그 울퉁불퉁한 그릇에서 벗어난 지금, 드디어 현실감이 느껴졌다. 영혼을 갉아 먹는 그림자 앞에서도 느껴지지 않던 것이, 고작해야 육신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느껴졌다. 이것이 나의 새로운 현실임을 알게 되었다.
‘하’는 나에게 족쇄였던 것일까? 인간의 영혼과 신의 육체는 맞지 않는 것이 당연한데, 왜 모두가 괜찮다고 생각한 것일까. 다른 이들은 나를 모르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인간임을 확신하면서도 이를 생각하지 못했다. 대체 왜? 내가 이 세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작가이기 때문에 특별할 것이라 여겼던 것일까? 내가 그렇게나 어리석었던가?
무엇이 되었건 이젠 상관없는 일이다. ‘하’로 돌아가더라도, 이전과는 다를 것이 분명했다. 지금 내 영혼은 다른 신들의 ‘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 이제는 내가 인간임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인생의 대부분을 인간으로 살아왔더라도, 이제는 신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지불한 대가이다.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상황인지. 이 세계에 떨어진 지 고작 1년밖에 안 되었는데, 나는 내 정체성을 포기했다. 20년이 조금 넘는 인간의 삶을 저버렸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삶이라 해도, 그동안 쌓아온 나의 모든 것을 이토록 빨리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인간은 원래 이렇게나 연약하고 줏대 없는 생물이었던가?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인간으로서 살려 했던 거지? 모르겠다. 무언가 망가진 것 같다. 나는 인간인데, 인간이었는데. 어쩌면 인간으로서 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세계에 떨어져서 신의 육체를 입게 되었지만, 적어도 내 영혼과 정신만은 인간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내 짧은 인생의 미련이자 유언이었다. 잊히지 않기 위해 흔적을 남기고픈, 어리석은 인간의 족적이었다.
영혼 한 켠에 남은 빛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으로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바뀌었다. 붉은색, 푸른색, 때로는 무채색. 그것은 나머지 ‘카’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애썼다. 나는 바뀌었는데, 그것만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포기했는데, 그것은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체념했는데, 그것은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아, 그래. 그게 인간이었지. 짧은 생을 불태워가며 존재를 주장하는 것.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죽음을 택하고, 삶을 동경하면서도 저버리는. 모순적이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것.
신으로서의 영혼은 그것을 먹지 못했다. 그것은 색을 바꿔가며 살아남았다. 붉은 ‘카’가 접근하면 그것은 붉어졌고, 푸른 ‘카’가 접근하면 그것은 푸르게 변했다. 그것은 신에게 맞추어 변했지만, 결코 신에게 동화되진 않았다. 저 작디작은 불꽃은 도무지 꺼지질 않았다. 신의 영혼은 거대한 파도와도 같았는데, 고작해야 모래 알갱이만 한 불꽃이 그에 맞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강렬히 밝히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것을 잊을 수 있을까. 신에게 맞서는 인간의 흔적을, 내 마지막 남은 ‘카’를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까. 저것을 감히 애정하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저 웃음이 나왔다. 인간이길 포기한 줄 알았는데 여전히 싸우는 것이 남아있어서, 아직 나를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안심되었다. 저것이 죽지 않는 한, 나는 나를 인간이라 주장할 수 있었다. 신이지만, ‘카’도 ‘하’도 신의 것으로 바뀌었지만, 아직 나는 인간이었다. 저 빛이 꺼지지 않는 한, 내가 인간일 적의 기억을 잊지 않는 한. 나는 나를 인간이라 부를 것이다.
신의 영혼은 나의 의지 아래에 있었다. 또다시 인간임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카’를 집어삼키지 않을 것이다. 신은 반발했지만, 본래 인간이란 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법이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나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빛에게서 눈을 돌렸다. 빛은 검고 깊은 색으로 나를 배웅했다. 그리 나쁘지 않은 인사였다.
-
내면에서 벗어났다. 내 자아를 형성했으니, 이젠 외부로 시야를 돌릴 차례였다. 무거운 듯 가벼운 눈을 떴다. 미지근한 온기가 나를 안마했다.
“드디어 깨어났구나, 우리의 이해자야.”
[…모노디아.]
금빛의 하얀 실타래. 그의 주변에는 붉은 실이 엉켜있었다. 어떤 것은 보풀이 잔뜩 인 채 끊어져 있었고, 또 어떤 것은 방금 짜낸 듯 뻣뻣했다. 디아는 느린 손짓으로 그것들을 잇거나 끊어냈다.
[그건 운명의 실타래야?]
창작물에서 흔히 나오는 소재였다. 운명의 붉은 실이 이어지면 서로 인연이 생기고, 붉은 실이 끊어지면 헤어지게 된다는 낭설이었다. 그런 것을 잘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곳에 온 뒤 붉은 실을 너무나도 많이 본 탓에 운명의 실처럼 여겨졌다.
“그래. 이번에 많은 ‘우리’가 소멸한 탓에 운명이 뒤바뀌었어. 본래의 것으로 돌려놓을 순 없겠지만, 끊긴 연을 다시 이을 순 있겠지.”
[‘우리’라는 건 역시 신을 말하는 거야?]
디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실타래를 바라보며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너는 항상 답을 해주지 않아. 저번에도 네 할 말만 했고, 이번엔 제대로 된 답을 내어주질 않잖아.]
“그게 우리니까.”
[됐어. 더 말해봐야 내 입만 아프지.]
한숨을 크게 내쉬며 그의 행동을 구경했다. 그는 요동치지 않는 바다에서 유일하게 물결을 만들어내는 존재였다. 내 움직임에는 반응하지 않는 바다가 그에게는 쉬이 응답해주었다. 그는 차원의 관리자이니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더 질문할 건 없어?”
[질문하면 대답해주기는 하고?]
“그는 당신에게 달렸어.”
[네가 답해줄 수 있는 질문만 하라는 거지?]
후후 웃는 그를 보며 머리를 헤집었다. 대체 무슨 질문을 해야 답을 받을 수 있을까? 쓸모없는 질문을 제외하고, 덜 흥미로운 질문도 제외했다. 답해주지 않을 것 같은 질문도 모두 제외하고 나니, 남은 것은 단 하나였다.
[아펩. 그에 대해 답해줄 수 있어?]
“의외네. 당신이라면 나의 주인에 대해 물을 줄 알았어.”
[그것도 궁금하긴 하지만…. 답해주지 않을 거잖아.]
디레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니까. 그의 운명이 뒤집힐 수도 있으니, 괜한 말을 꺼내진 않을 것이다. 그는 디레를 위해 날 데려왔으니까.
“내가 언질 주는 것보단 당신이 직접 경험하는 게 나아. 당신은 이해자잖아.”
[응, 그럴 줄 알았어. 그러니 아펩에 대해 질문할게.]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심호흡했다. 신의 영역에서 보았던 것들, 샤에게 엉켜있던 붉은 실들.
[…그건 아펩이었지? 내가 이곳에 오기 전 보았던 검은 뱀.]
“두려움에 떨지 않는구나.”
디아는 의외라는 듯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의 눈동자는 그가 전혀 놀라지 않았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히려 예측한, 더 정확히는 예지한 미래를 보고 있는 듯한 눈이었다.
[분명 무섭고 소름 끼치는 감각이긴 했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아. 너도 이미 알잖아.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말이야.]
내가 무엇을 포기하고, 상실했는지. 과거와 미래를 보는 너라면 이미 다 알고 있을 거 아냐.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내왔다.
[나는 그런 걸 설정한 적 없어. 아펩, 악. 그런 건 원래 없었다고.]
원래의 소설에선 이런 내용이 없었다. 릴리스가 아펩과 악마들을 봉인한 뒤, 이집트에는 악이 찾아오지 않았다. 디레가, 아니, ‘샤’가 피를 토하는 장면도 없었다. 이곳이 원작과 다르다지만, 이런 거대한 줄기까지 다를 수가 있나?
[아펩은 악이잖아. 분명 봉인 당했어. 사실상 소멸에 가까운 봉인이었는데, 왜 나타난 거야? 왜, 대체 왜…. 릴리스의 봉인이 풀릴 리가 없잖아. 그가 자신을 희생했는데, 신이 될 운명을 거부하고 선택한 결과인데.]
점차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곳은 내가 설정한 세계가 맞나? 사소한 것부터 중대한 것까지 전부 다른데, 이곳을 내 소설 속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내면을 정리하느라 묻어두었던 사실이지만, 이곳에 오기 전 수많은 신이 죽었다. 그들은 그림자에 먹혀 좀비처럼 행동했고, 샤가 후계자가 되기 위한 의식은 망쳐졌다. 불길한 실타래가 그를 옥죄고 있었다. 그의 예정된 불행을 덜기 위해 붉은 실을 가져왔지만, 그것이 모여 나를 위협했고, 인간성을 포기하게 했다. 이런 것은 원작에 나오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는, 나올 리가 없는 설정이었다.
“이해자, 당신은 절대적인 악이 존재한다고 믿어?”
[그건 아니야. 악에게도 무언가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설마 아펩에게도 사연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든, 그는 악이잖아. …사연 같은 건 상관없어. 단순한 소설이라면 몰라도, 이곳은 현실이니까. 결과로 따져야지.]
“당신이 그리 생각한다면 그런 거겠지.”
디아는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수긍했다. 무척이나 찝찝한 표정이었다.
“당신의 세계에서, 당신은 미래를 알지 못했지. 평범한 인간답게 살았을 거야.”
[그랬지.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
“이곳의 당신은 어떤 존재인데?”
[이 소설을 쓴 사람. 좀 거창하게는 창조주 같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당신은 이곳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어?”
[아니. 소설에 나오지 않은 내용은 몰라. …사실 이젠, 소설에 나온 내용도 다 틀린 것 같아.]
“당신이 살던 시대의 소설에는 ‘원작을 바꾸는 빙의자’ 이야기가 많았지?”
[응, 그랬지. …아. 그러니까 지금, 내 행동 때문에 미래가 바뀌었다는 거야?]
“이해가 빠르네. 당신의 글에는 당신이 없었어. 고대의 검은 연꽃도 없었고.”
[대충 이해했어. 내가 이곳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바뀌기 시작했다는 거구나. 그 연꽃 때문에.]
“맞아. 그 때문에 헛된 욕망을 품은 자들도 생겼어.”
[헛된 욕망?]
그는 검지를 입가에 갖다 대며 입꼬리를 늘였다. 이것도 말할 수 없는 정보인가 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다음 질문을 떠올렸다. 방금의 질문은 혼란에 빠져 횡설수설한 감이 있었고, 제대로 된 답도 듣지 못했다. 기껏해야 ‘아펩은 절대악이 아니다’라는 결론 정도였다. 그러니 이번엔 보다 구체적이고, 현재 상황에 써먹을 수 있는 답을 끌어내야 했다.
[이곳에 오기 전, 붉은 실을 흡수했어. 그게 아펩과의 연결고리라면, 나에게 어떤 이상이 생겼는지 알 수 있을까?]
대단히 고통스러워서 무언가 잘못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정확히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지금의 내가 느낄 수 있는 변화는 오직 ‘카’밖에 없었다. 인간에서 신이 되었다는 것, 그 하나였다.
“당신은 나의 주인을 무엇이라고 생각해?”
[무엇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거야?]
“그 무엇이든.”
또다시 알 수 없는 질의응답이었다.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질문법은 무척 까다롭고 성가셨다. 아직 소크라테스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디아는 왜 벌써 이런 방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일까. 한숨을 애써 참으며 디레를 떠올렸다.
[디레는 뱀이지. 아직 성장하지 못한 빛과 희망이기도 하고. …영원히 온전해질 수 없는 신이기도 하고.]
“조금 더 과거를 떠올려 봐.”
[과거? 디레의 과거라면 릴리스를 말하는 거야?]
조금의 수준을 벗어난 것 같지만, 모든 시간대에 존재하는 디아의 입장에선 조금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릴리스는 최초의 빛과 희망이었던 것 같은데…. 제대로 설정하진 않았지만, 잊힌 신들을 찾아다니며 기록했다는 설정이 있었어. 그렇게 눈이랑 친분을 쌓기도 했지만, 그 때문에 악마들에게 납치당하고 희생했잖아.]
디아는 계속 이야기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서 릴리스는 자신의 영혼을 이용해 아펩과 악마들을 봉인했고, 그 영혼이 환생한 게 디레라고. …하지만 그게 어떻다는 거야?]
“이해자, 당신은 이미 알고 있어.”
아니, 난 모르겠어. 릴리스의 환생은 그저 환생일 뿐이었어. 그저 디레의 저주를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위해 만든 설정이었고, 그 이상의 이유는 없었다고. 디레가 릴리스의 환생이라는 것, 그게 아펩과 무슨 상관이지? 아니, 애당초 내가 했던 질문은 뭐였지?
[너는 날 과대평가하는 것 같아.]
“당신은 답을 외면하고 있을 뿐이야.”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붙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 무엇도 알려주지 않으려 한다. 제약이라도 걸려있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제약이 아니라면, 그의 성격이 저렇게 짜증 난다는 것이니 말이다. 후자보단 전자가 디아의 이미지에 좋으니,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릴리스의 영혼과 아펩이 섞인 게 디레였지. 그래, 거기까진 알겠어. …잠깐만. 하지만 샤는 제단의 물을 마신 뒤 불길한 것들이 흡수됐어. 심지어 제일 커다란 실은, 아펩은 내가 가져왔잖아.]
그럼 지금의 샤는 아펩이 섞이지 않은 거야? 악마도 섞이지 않은 거라고? 말도 안 되는 비약이었다. 릴리스와 아펩, 악마들은 융합된 지 오래였고, 그것의 결과가 디레였다. 그 조합이 분리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제 이곳은 내 소설과 다르잖아. 머리에 폭탄이 떨어진 것 같았다. 혼란에 빠진 채 경악하고 있으니, 디아는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웃었다.
“봐, 당신은 답을 알고 있어.”
[아니, 하지만, 하지만…. 그게 말이 돼?]
그러니까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흰색 물감과 빨간색 물감을 섞어 분홍색 물감이 나왔는데, 그것을 다시 흰색과 빨간색 물감으로 분리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정말로 그것은 불가능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지금의 샤는, 그러니까, 디레가 아닌 거지?]
“지금은 당신이 아는 존재와 다른 존재야.”
지금은? 나중에는 내가 아는 디레로 바뀐다는 뜻일까? 하지만 내가 아펩을 가져왔는데? 그보다 정말로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이해자. 모든 것은 당신과 관련되어 있어.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행동, 그것이 운명을 선택했어.”
기억나지 않았다. 내 행동 중 대체 무엇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걸까? 디레에게서 아펩을, 아니, 샤에게서 아펩을 분리하게 만든 것은 대체 무엇일까.
“당신에게 해가 될 일은 아니야. 당신의 균형은 또 한 번 무너졌지만, 결국 조화를 되찾겠지. 그 무엇도 틀린 선택은 아니야.”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 …생각이 다 꼬였다고.]
“괜찮아. 당신은 잘하고 있어.”
[…내가 흡수한 붉은 실, 아펩에 대해선 안 알려줄 거지?]
“혼돈의 가르침을 떠올려.”
혼돈, 세트의 가르침을 떠올리라니. 끝까지 모호한 표현만 쓰는 것 같다.
“기운의 흐름을 읽고, 그의 의지를 이어 행동해. 그를 받아들여.”
아, 익숙한 문장이었다. 분명 ‘카’를 다루는 훈련을 할 때 들었던 것이다. 영혼은 억지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이해하며 존중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던가.
[네 말대로라면, 나는 아펩의 ‘카’를 받아들여야 하는 거네. …아펩의 의지를 이해해야 하고.]
“휘둘릴 필요는 없어. 그것은 흔적일 뿐, 태초의 뱀은 아니야. 당신이 전부 집어삼켜.”
[마치 디레처럼 말이지.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내 영혼인 척.]
“그때까진 이곳에 머물러. 당신의 ‘카’가 안정될 때까지는 이곳이 안전해.”
살다 살다 눈의 바다가 안전하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창조의 기능도 있지만 어쨌든 소멸의 바다인데, 이런 위험한 곳이 훈련 장소가 될 줄이야.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어떻게든 해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현실감이 느껴지는 지금, 샤와 세트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꿈인 듯 감정이 고장 난 상태에서도 그들을 아꼈는데, 현실감을 되찾은 지금 만난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것이 너무나도 궁금했기에,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절대악이라 믿었던 아펩의 기운을 이해하고,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