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망록

7화

5,057자

세트와의 훈련을 시작한 지 수십 일째 되던 날, 나는 드디어 호루스의 지팡이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지팡이를 이브-심장에 보관하는 것도 수월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지팡이를 소환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내 손아귀에서만 소환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소환 위치도 지정할 수 있다. 원한다면 수십 미터 바깥의 허공에서 지팡이를 떨어트릴 수도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는데, 가장 큰 희생양은 세트였다. 실력이 서툴 때, 세트의 머리 위에서 지팡이를 떨군 적도 있었다. 지팡이에 얻어맞은 그는 잠깐 얼빠진 표정을 하더니, 배를 잡고 웃으며 지팡이를 건네주었다. 정말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그래도 화를 내거나 짜증 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가 그런 감정을 표출했다면 꽤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이외에도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잦았다. 물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지팡이를 이용한 호신술을 배우기도 했는데, 지팡이를 잘못 휘둘러 세트의 옆구리를 세게 가격한 적도 있었다. 그는 고통을 표현하지도 않고, 그저 웃으며 칭찬을 읊어댔다. 전쟁 신의 옆구리를 때린 건 네가 유일하다느니, 속도와 무게감을 봐서는 상당한 재능이 있다느니 하며 말이다. 막을 수 있음에도 가만히 맞아준 걸 아는데, 그는 자꾸만 나를 칭찬하려 들었다. 덕분에 들떠서 더 열심히 배우긴 했지만…. 아, 이걸 노린 건가? 대단한 전략이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세트는 온갖 것들로 나를 칭찬하려 든다. 훈련을 따라가기만 해도 영특하다는 소리를 듣고, 쓸데없는 것을 물어봐도 훌륭한 지식인이 될 것이라며 웃는 모습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놀리는 것인지 의심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봐도 진심으로 칭찬하는 것 같아 의아해졌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그의 칭찬을 들은 내가 기쁜 나머지 의욕을 더 불태운다지만. 이건 너무 과하지 않나? 이러다가는 걷기만 해도 칭찬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나쁜 기분은 아니다. 칭찬이 적은 것보단 많은 게 더 좋지 않은가. 내가 기고만장해져 자만심에 빠질까 걱정될 때도 많지만…. 그래도 칭찬 없이 사는 것보다는, 나를 곱게 여기지 않는 자 밑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행복했다. 세트 옆에 머무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들었던 걱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화를 내지 않고 받아주며, 심지어는 긍정적인 말까지 전해준다. 그의 곁에 있으면, 나는 깎여나갔던 자존감을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내 실제 실력과는 상관없이, 그저 내가 노력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힘이 나지 않아 쉴 때도 촉박함을 느끼지 않고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한국에서처럼 내가 정체되어 있다는 공포에 잠식될 일도 없었고, 평소처럼 무능감에 빠져 침울해질 일도 없었다. 휴식 없이 달려야만 했던 때와는 다르다. 휴식이 죄가 되었던 때와는 다르다. 그는 쉬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에, 쉬고 있는 나에게 윽박지르지 않는다. 오히려 적당한 때에 휴식을 취했다며 칭찬한다. 그러니 내 우울감이 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보통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편이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빽빽한 계획을 세워두고, 그에 맞춰 살지 않으면 나를 한심하게 여기며 비난했다. 여유롭게 계획을 세워두어도 마찬가지였다. 일정이 비어 있는 시간이 이렇게나 많은데, 왜 그 시간을 더 유익하게 보내지 않느냐며 자책했다. 세부 일정의 결과물에 대해서도 깐깐하게 평가하는 편이었다. 예를 들어, 글을 쓴다고 가정해보자. 그날의 몸 상태에 따라 글을 쓰는 속도나 글의 질 등은 크게 달라지는데, 나는 이를 알면서도 무시했다. 언제나 빠른 속도로 최고의 글을 뽑아내고 싶어 했다. 속도가 조금이라도 느려지거나 글의 전개가 답답해지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일정을 모두 끝낸 뒤 글을 쓴다는 것부터가 대단한 일임을 모른 채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그저 알면서 무시했을지도 모르지. 나는 언제나 완벽해지고 싶었으니까.

 

이곳에 와서도 나는 변하지 않았다. 별다른 능력이 없었기에, 원작의 지식에 집착했다. 저들은 모르는 미래를 가지고,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의 가치를 높이고 싶어 했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저들을 그저 등장인물로, 내 작품 속 캐릭터로 취급하고자 애쓰는 것은. 저들을 실존하는 인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내가 저들을 만들었다고 말하며 우위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은 내가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조금이라도 우울감에서 멀어지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세트의 곁에 머무르면 그런 것들이 상관없어지는 것 같다. 나는 저들의 창조주일 필요도 없고, 다 어긋나버린 원작을 안고 있을 필요도 없다. 세트는 나에게 잠재되어 있던 능력을 깨워주고 있고, 나는 그가 제시하는 방향을 따라 걸어가면 된다. 아직은 모자라지만, 몇 주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고, 앞으로는 더 성장할 것이다. 내 성장 속도는 디레와 비슷한 수준이므로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성장 속도가 느리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세트는 각자의 속도대로 살면 된다고 말했고, 아주 느리게라도 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완벽하지 않음이 당연하다고 했다. 오랜 세월을 산 자신도 뼈아픈 경험을 하고 후회하는데, 어린 네가 실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나의 실수에 붙잡혀 매몰되지 말라고. 그는 그렇게 나를 안정시켰다.

 

지금의 나는 편안한 상태이다. 세트는 나에게 많은 것을 제공해주었다. 애정, 소속감, 가치감까지. 끝없이 뻗어 나가던 부정적인 생각은 죄다 잘려나갔고, 그 자리를 흥미와 행복이 대체하기 시작했다. 원작과는 별개로 드는 이 세계에 대한 호기심,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은 채 사라져버린 고대의 신들에 대한 관심, 그에 더해 나도 모르는 내 능력에 대한 것까지 탐구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세트는 이런 나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내 질문에 최선을 다해 답해주고 있다. 한평생 공부를 하며 살고 싶다던 내 꿈이 이뤄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분명 행복에 취해있었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세트가 내미는 모든 것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호루스 때와는 달리, 그는 나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곁에 머물 것이라는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사람을 구원 삼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성적인 판단을 접어둔 채 세트에게 의지했다. 그래서, 나는 답지 않게 흐름을 놓치고 말았다. 세트가 일부러 숨긴 정보들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그저 낙원과도 같은 생활만 바라보느라 중요한 것들을 잊어버렸다. 개벽과도 같은 사건이 시작되었음을, 너무나도 늦게 깨달아버렸다.

 

 

-

 

몇 달은 순식간이었고, 모든 신이 기대하던 의식도 곧이었다. 내 일정은 바뀌지 않았지만, 세트는 점점 바빠져서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든 상태이다. 호루스 때처럼 외롭지는 않다. 그때는 완전한 방치였지만, 세트는 나를 최대한 배려하려는 모습이 보여 괜찮다. 세트가 없을 때는 기운을 다루기 위해 훈련하며 시간을 보냈고, 그 과정에서 고독함이 들 틈은 거의 없었다. 세트가 시킨 것들만 해도 하루가 끝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세트를 비롯한 모두가 바빠 보였다. 호루스와 샤는 못 만난 지 좀 되었고, 안면만 겨우 익힌 신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다. 엑스트라 신들은… 별로 관심을 주고 싶진 않지만, 그들은 꽤나 들뜬 분위기이다. 수천 년 만의 행사이기도 하고, 그 주인공이 푸른 연꽃의 주인이기까지 하니, 그들이 거는 기대가 클 만도 했다.

 

그 사이에서 나만 평소처럼 사는 기분이다. 샤가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는 건 무척 설레고 긴장되는 일이지만, 그것과 내 일정은 별개의 문제이다. 적어도 고위 신들과 비슷한 위치에 서기 전까지는 계속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분위기에 휩쓸려 놀았다가는 그대로 몇 주를 땅에 내던지게 될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경각심을 가진 채 성물과 기운 다루는 것을 연습하니, 처음과는 달리 능수능란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엑스트라 신들의 뒤통수를 때릴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후계자 공표식만큼이나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내일이 그날이지? 그, 후계자 공표하는 것 말이야.]

 

그래, 벌써 내일이다. 샤의 위치가 굳건해지고, 호루스의 후계자로서 많은 권한을 이어받을 날이 다가왔다. 의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세트에게 물어봐도 알려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답변만 돌아오니,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대략적인 식순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기다리기만 하니 무척 답답하다. 신의 영역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주워들으려 해보았지만, 엑스트라 신들이 제공하는 정보는 질이 좋지 않았다. 가벼운 가십거리나 떠들고 있었다. 그래, 내가 너희한테 뭘 기대하겠니. 오늘도 그들에 대한 평점은 바닥으로 내리꽂히는 중이었다.

 

[그 의식을 치르면 어떻게 변하는 거야? 신들에게 알리는 것 말고, 특별한 용도가 있어? 예를 들어 호루스의 카가 샤에게 흘러들어온다든지 하는 것들. 그런 게 가능해지는 거야?]

 

고개를 갸우뚱하며 세트를 올려다보자, 그는 어디까지 설명해도 좋을지 가늠하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헛기침 소리와 함께 평소와 같은 어조의 설명이 들려왔다.

 

“네가 말한 그대로다. 호루스의 카를 일부 빼내어 그 후계자에게 전달하면, 후계자는 카를 소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해. 혼재된 기운을 꺼내 가장 자신 있는 능력을 선보이는 게 의식의 마지막 과정이다.”

 

[만약 기운을 소화하지 못하면 어떻게 돼? 물론 샤는 뭐든 잘하겠지만, 그런 신이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 녀석은 재차 의식을 치러야겠지. 우리에게 인정받을 때까지 훈련하고 능력을 발휘해야 할 거다. 하지만 그럴 일은 거의 없어. 일부러 과한 양의 카를 전달하지 않는 이상, 의식은 반드시 성공하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말은 이상하게 들렸다. 마치 실패한 전례가 있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까지 신들의 대표는 몇 없지 않았던가. 눈과 라, 호루스. 이들이 전부였다. 눈에서 라로 바뀔 때는 별 이상이 없었을 테니, 역시 호루스가 후계자로 공표될 때 무슨 일이 있던 걸까. 그가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받은 것과도 관련되어 있을까.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을 게 뻔하다. 궁금증을 마음 깊은 곳에 보관해둔 뒤, 평소처럼 지팡이를 소환했다. 세트의 지도를 받으며 훈련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