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첫날의 복잡다단한 일이 끝나고, 며칠간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매일 같은 시간에 열매를 요구하는 나를 위해, 세트는 신전 외곽에 나무를 심었다. 내 키가 될 듯 말 듯한 높이의 나무에는 몇 개의 열매가 달려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수확한 뒤 하루가 지나면 같은 자리에 열매가 맺혀 있는 게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속도였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 믿으며 신나게 뛰어다녔다. 그런 나를 보며, 세트는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이런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세트는 꽤 친절했다. 그 커다란 덩치와 새까만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걸 반전 매력이라 하던가? 첫인상은 분명 ‘조금 무섭게 생긴 어둠의 자식’이었는데, 현재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해도 잘할 것 같다’로 바뀌었다. 내가 엉뚱한 질문을 던져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거나 한숨을 내쉬지 않고, 모를 수도 있다고 수긍하며 자세히 설명해준다. 왜 이런 신이 기피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인지 의아하다. 다른 신한테는 욕하며 멱살이라도 잡는 걸까? 아니면 역시 다른 신들이 먼저 잘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엑스트라 신들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가만히 있는 세트를 욕했다든지…. 음, 생각할수록 설득력 있는 가설인걸. 나한테도 그러던 놈들이니 세트에게 그랬을 수도 있겠지. 그들은 멍청하니까.
아무튼, 세트와 지내는 나날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뿌듯한 일만 가득했다. 그는 나에게 잠재된 능력을 끌어내기 위해 여러 훈련을 시켰다.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훈련은 아니었다. 무협의 칼을 수백 번 휘두르고 바위를 들어 올리는 등의 훈련과도 거리가 멀었고, 공자 왈 맹자 왈 하며 이론만 학습하는 방식도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마약 탐지견을 훈련시킬 때와 비슷한 방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운, 혹은 생명력이라고도 부르는 카의 일부를 꺼내었고, 그것에서 어떤 느낌을 받는지 이야기하게 했다. 단답형 대답이 아닌 서술형 대답을 원했기 때문에, 나는 온갖 비유를 사용하며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야만 했다. 문과이자 작가라는 사실이 감사하게 여겨질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헛웃음을 지으며, 그동안의 훈련을 돌이켜보았다.
훈련 첫날에는 무척 작은 기운을 탐지하게 했다. 일반적으로는 탐지하기 쉬운 큰 것부터 접하는 게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운은 오래 산 만큼 방대했고, 극히 일부만 꺼내도 숨이 막힐 정도로 높은 밀도를 자랑했다. 즉, 자칫하다가는 내 목숨이 위험하다는 뜻이다. 세트는 이를 잘 알고 있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치로 기운을 쪼갠 뒤 끄집어냈다.
“닿지 않게 조심해라. 내 아래에 있는 녀석이 기절하는 꼴은 별로 보고 싶지 않다고.”
거참, 말을 예쁘게도 한다. 지금이야 저 말이 걱정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당시에는 어투가 너무 싸늘한 나머지 몸이 굳었던 것 같다. 안 그래도 그의 기운 때문에 긴장한 상태였는데, 협박하는 듯한 말까지 들으니 쉽게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나를 눈치챈 세트는 조금 당황해하며 말을 취소했다. 어린 녀석과 함께한 적이 없어서 말이 세게 나왔다고 한다. 그는 미안하다는 듯 내 어깨를 조심히 토닥였다. 내가 긴장이 풀려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이젠 괜찮아. 저기 떠다니는 기운을 묘사하면 되는 거지?]
“그래. 혹시 모르니 내 옆에 붙어 있어. 멋대로 움직이진 말고.”
[네엡, 알겠습니다~]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인 뒤, 허공을 천천히 유영하는 기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세트의 눈동자처럼 끝없이 깊은 색상을 띄고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구슬처럼 생긴 그것은 묘하게 기체처럼 흩어진 상태였다. 뭐라 묘사하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세트가 요구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이었으니, 표현은 이 정도면 하면 되겠지.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집중력을 모아보려 눈을 감은 채 잡생각을 지웠다. 몸 안에 가득 찬 공기를 마지막으로 내뱉은 뒤, 천천히 눈을 떠 기운을 관찰했다.
[일단… 어둡네. 따스함은 없지만, 그리 서늘하지도 않아. 조금 건조한 것 같기도 하고…. 음, 이건 뭐지. 만지면 따끔거릴 것 같은 느낌인데.]
세트는 잘하고 있다는 듯 어깨를 한 번 토닥였다. 그의 손은 내 어깨 위에서 떨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 저 기운을 없앨 때까진 이러고 있을 것 같아, 그의 두꺼운 손을 흘겨보고는 다시 기운에 집중했다.
[모래… 모래 맞아? 조금 거친 모래…. 아, 네가 사막의 신이었지. 잠깐 잊고 있었어. 미안. 그럼 이건 모래라 치고……. 중간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뭔지 모르겠어. 뭔가 질척거리고, 끈적거리고, 차갑고, 따갑고, 소름 끼치는…….]
문득 숨이 막혔다. 알 수 없는 것이 목을 죄는 느낌이었다. 내부를 터트려버릴 것처럼 꽉 쥐고, 있는 공기마저 꺼트리려 흔들어대는 잔혹한 손길이었다. 나는 일말의 소리조차 내지 못한 상태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가는 걸 느껴야만 했다. 목이 새까맣게 타는 것 같았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세트는 황급히 기운을 집어넣으며 내 목덜미를 거칠게 쓸어내렸다. 살갗의 고통은 내부의 것에 비하면 미약한지라, 그의 행동을 보지 못했다면 그저 가볍게 접촉한 줄 알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내부의 고통이 심했다. 나는 갑작스레 들어오는 공기에 캑캑거리며 휘청였다. 분명 따뜻한 공기여야 하는데, 너무나도 차갑고 따갑게 느껴졌다. 숨을 쉴 때마다 가시가 들락거리는 것 같았다.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
“미안하다. 네가 그것까지 볼 줄 몰랐어. 진작 눈치채야 했는데, 정말 미안하다. 훈련은 여기까지다. 이상 없는지 좀 보자.”
하, 이런 실수를 하다니. 그는 자책하며 머리를 헤집었다. 이를 악문 채 씨근덕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에게 괜찮다는 말이라도 전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목은 여전히 타는 것 같았고, 머리도 빙글빙글 돌았다. 심장은 자기주장을 하듯 쿵쿵 뛰었으며, 급하게 활동을 재시작한 폐도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몸은 이미 통제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입을 열려던 찰나 조금 남은 이성마저 휘발되었고, 그대로 시야가 어두워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며칠이 지난 상태였다. 세트는 답지 않게 수척해진 모습으로 재차 사과해왔다. 내가 기절해 있는 동안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것 같았다. 나는 그때의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않은 탓에 그를 원망하는 등의 감정은 전혀 없었지만, 고개를 푹 숙인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 같았다. 괜찮다고 말해야 하나? 입 안쪽의 살을 꽉 깨문 것처럼 보이는데, 혹시 화가 난 걸까? 나에게, 아니면 자신에게? 내가 괜찮다고 말하면 자책하진 않을까? 잠시 눈을 굴리며 고민하다가, 그가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말보다 행동이 더 와닿을 때가 있지 않은가. 지금이 그때인 것 같았다.
세트는 고개를 들어 나의 목 부근을 훑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참지 못한 죄책감이 빠져나온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무어라 중얼거리기도 했는데, 발음이 불명확해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아마 그 사태를 방지하지 못한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건 아닐까. 어쩐지 그런 분위기였다. 아직 그의 성정을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그렇게만 느껴졌다.
이후 세트는 훈련 방식을 바꾸었다. 아무리 소량이어도 그의 기운은 위험할 수 있으니, 비효율적일지라도 안전한 호루스의 기운을 탐색하는 것으로 말이다. 나에게는 아직 호루스의 지팡이가 있었고, 모든 성물에는 주인의 영혼이 들어있으므로 꽤나 적합한 소재였다.
“자, 지팡이 들고, 옳지. 이제 눈을 감고 지팡이 안쪽의 기운을 느끼는 거다.”
세트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내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지팡이를 두 손으로 잡아 든 것만으로도 기특해하는 표정을 지으니, 괜히 부끄러운 심정이었다. 며칠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아마 죄책감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곤 해도 이런 원색적인 칭찬이라니. 나중에는 숨만 쉬어도 칭찬할 것만 같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눈을 감고, 그의 안내대로 기운을 느끼려 노력했다. 차갑던 지팡이는 내 손의 온기로 인해 미적지근해졌고, 이내 기묘한 박자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강아지나 고양이에게서 느껴지는 수준이었지만, 점차 거대한 동물의 박동처럼 바뀌어나갔다. 눈앞에서 사람만한 크기의 심장이 뛰고 있는 것처럼, 귓가에는 거대한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울렸다. 어느 순간부터 그 소리는 커지지 않았지만, 그를 대신하듯 지팡이 온도가 높아져만 갔다. 그것이 내 체온보다도 뜨거워졌을 때, 나는 내 주위를 감싼 따뜻한 햇볕을 느낄 수 있었다.
“잘하네, 도와주지 않아도 카를 꺼내다니. …호루스는 눈이 삐었나. 어딜 봐서 모자란다는 거야.”
세트는 칭찬을 하다말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혼자 중얼거리는 것으로 보아서는 나에게 안 들리길 바라는 것 같은데, 정말 안타깝게도 그중 두 문장을 들어버렸다. …호루스는 내가 모자란다고 했구나. 저런 욕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다음에 만나면 잔뜩 골려줘야겠다.
“시륜, 집중해.”
아, 다른 생각 하는 것을 들켰나 보다. 급히 지팡이에 집중해보니, 햇볕이 확연히 줄어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주변으로 햇살을 두르며 지팡이 내부의 기운을 끄집어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조금 슬프게도, 그 기운은 내 말을 듣지 않은 채 지팡이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서로를 끌어당기며 계속 고이기만 했다.
[이거… 어떻게 움직여…?]
“움직이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거다. 기운의 흐름을 읽어. 그의 의지를 이어 행동해.”
그게 무슨 말인데…. 범인은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었다. 무협 소설에 빙의한 주인공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양과 음의 조화를 이루어 태극을 어쩌고’하는 이론과 지금의 설명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무언가 뜻이 있는 문장이라는 건 알겠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도, 실현할 수도 없는 이상한 설명이었다.
일단은, 그래. 받아들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억지로 움직이려 하거나 명령을 내리지 말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놔두라는 뜻이겠지. 조절하지 말고 수용하는 것. 대충 심리치료에서 말하는 감정과도 같으니,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다. 이 기운도 결국 호루스의 카가 표출된 형태이고, 카는 영혼이니. 달리 말하면 그의 정신 상태와 비슷하다는 것 아니겠는가.
호루스는 대단히 까칠하고, 자기중심적이며, 공감 능력도 부족하다. 어지간한 장난은 다 받아주지만, 이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굳이 화를 내어 평판을 깎고, 자신의 자애로운 모습을 해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 만들어진 행위이다. 그는 올곧은 태양신으로서의 면모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존재. 그를 위해서라면 본성을 감춘 뒤 상대를 위하는 척 살아가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면… 그의 기운은 대단히 이기적이며 오만하겠네. 남의 말을 잘 듣지도 않고,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믿으며 멋대로 행동하겠지. 이 기운을 다루려면, 결국 그의 신념에 따르는 척하는 수밖에 없다. 썩 마음에 드는 선택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세트의 기운을 관찰했을 때처럼 지팡이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기운의 흐름을 읽고, 그의 의지를 이어 행동한다.’ 그 순간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세트의 설명을 그대로 흉내 내 체화하는 과정이었다.
호루스의 기운은 답지 않게 따스했다. 태양신이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성정을 떠올리면 조금 낯선 느낌이기도 했다. 태양치고는 온도가 낮은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의 지팡이에서 나오는 빛은 아침 햇살과도 같은 부드러움이 있었다. 그리 뜨겁지도, 따갑지도 않은 적당한 빛이었다. 하지만 이 빛은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들려 하면 곧바로 날 밀어내며 찔러댔다. 바늘보다 가느다란 가시가 잔뜩 꽂힌 것만 같았다.
그리 아프지는 않지만 성가셨기에, 얼굴을 찌푸리며 기운을 살살 달래주었다. 너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기운을 약탈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너의 자애로움을 느끼며 생명력 가득한 온기를 느끼고 싶을 뿐이다. 음… 이렇게 말하니 차라리 아부에 가까운 문장인 것 같긴 하다. 호루스는 아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듯했지만, 반대로 그의 오만한 기운은 만족스러운 듯 가시를 누그러뜨렸다. 자신의 생명력을 느껴보라는 듯 나를 더 끌어안기까지 했다. 문득 든 우스움을 재빨리 지워낸 뒤, 기운이 내어준 길을 따라갔다.
어째서인지 기운의 안쪽은 푸른 느낌이 강했다. 차갑다는 뜻은 아니다. 바깥의 기운이 노란빛의 부드러운 따스함이었다면, 안쪽의 기운은 푸른 불꽃과도 같았다.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항성이었다. 조금 부담스러워 멈칫하니, 기운이 나를 끌어당기며 깊은 곳에 밀어 넣었다. 나를 배려하지 않은 채 재촉하는 거친 흐름이었다.
얼떨결에 끌려간 나는 푸른 불길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었다. 푸른 불길은 넘실거리며 나를 탐색했고, 나 역시 움찔거리며 그것을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긴장감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지만, 여차하면 세트가 막아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침착해지려 노력했다. 내가 긴장을 풀고 나니, 푸른 불길은 몸을 부풀리는 것을 멈추었다. 혹시 내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어 경계하던 것도 멈추자, 불길은 점차 사그라들며 작아졌다. 항성처럼 거대하던 것은 손바닥에 올려둘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빛이 되었다. 나는 떨지 않으려 애쓰며 다가간 뒤, 조심히 손을 뻗어 불꽃을 어루만져 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뜨겁던 불꽃은 적당한 온기만을 품은 상태였다. 그것은 내 손길을 따라 날름거렸는데, 그 모습이 조금 귀여워 보여 웃음이 나왔다.
그럼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흐름에 따라 깊은 곳까지 왔고, 기운의 의지와 반대되는 행동도 아직 하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이것을 내 마음대로 움직여야 했지만…. 세트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고, 나도 이 기운을 조절할 자신이 없었다. 방금처럼 아부하며 움직여달라고 하는 건 자존심 상하기도 하고, 계속 통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한 것 같다. 불꽃이 내 눈앞까지 다가온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집중한 상태였다. 불꽃이 소리 없이 움직여 내 콧잔등을 껴안은 뒤에야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놀랐고, 불꽃은 나를 비웃듯 하얘졌다가 파래지기를 반복했다. …불꽃의 뒤로 호루스가 보이는 것 같다. 대략 불투명도 50쯤으로 말이다. 한숨을 꾹 참으며 불꽃을 떼어내려 하니, 그것은 내 손을 피하며 머리카락 사이로 숨어버렸다.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두피 곳곳을 훑어보았지만, 불꽃은 쉬이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카락에 스며드는 듯 흩어지기만 했다. 그냥 영양제인 셈 치고 포기할까. 불꽃이 나와 장난을 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내 짜증을 불러일으키고 싶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단지 귀찮았다. 이만하면 오늘치 훈련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까?
기운을 탐색하던 것을 멈추고 눈을 뜨니, 동공이 커진 채 숨을 멈춘 세트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라, 이건 좀 공포인데. 덩달아 놀란 나도 숨 쉬던 것을 멈추며 몸을 뒤로 물렸다. 동공이 커진 채 똑같은 표정을 짓던 그와 나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던 거야?]
“네가 근원까지 끌어낼 줄은 몰라서.”
[근원이라고?]
어리둥절한 마음에 대꾸하자, 그는 장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설명해주었다.
“네가 본 푸른 불꽃은 호루스의 근원이다. 미약한 수준이지만 그 지팡이에도 들어가 있어.”
[하지만 끌어내진 않았는데? 오히려 내가 떠밀렸는걸.]
“근원이 널 인정했다는 거지. 널 해치지도 않았잖아?”
[그건 그렇지만…. 스트레스, 아니, 정신적으로 타격을 입은 기분이야.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체력이 사라진 느낌….]
급히 단어를 수정하며 말끝을 흐렸다. 무어라 반박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딱히 다친 곳도 없고, 근원이라는 것도 보고 왔으니 말이다.
“네 카와 호루스의 카가 섞였으니 당연한 일이지. 너는 못 느끼는 것 같지만, 지금 네 머리에서는 호루스의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다고.”
그것도 풀풀 말이지. 세트는 의태어를 길게 발음하며 씨익 웃었다. 어째서인지 조금 놀림 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입을 벙긋거리며 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머리에서 호루스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소리지? 그 불꽃이 영양제처럼 머리카락에 스며들었다고 생각하니, 우습기도 하고 희한하기도 해서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근원을 끌어냈다는 건 그런 뜻이었어? 그 불꽃을 지팡이에서 내 몸으로 옮겼다는 거?]
“그래. 조금 더 다듬을 필요는 있겠지만, 언제든지 지팡이를 소환할 수 있을 거다. 네 몸속에 숨겨둘 수도 있겠지.”
[…잠깐만. 몸속에 숨긴다는 건 무슨 뜻이야?]
수많은 가정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저 지팡이를 작게 만들어 꿀꺽 삼키는 것부터 지팡이가 저절로 분해되어 체내에 스며드는 것까지. 열 번째 가정이 떠오를 때쯤, 세트는 자신이 한 말을 정정해주었다.
“정확히는 네 이브에 숨겨두는 거지. 그 펄떡거리는 심장에 보관해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거다.”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브, 심장. 이집트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장기. 하지만 현대인인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커다란 지팡이를 무슨 수로 심장에 넣지? 축소할 수도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찔러넣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 게다가 심장에 지팡이를 넣으면 혈액순환에 지장이 생기지 않나? 시선을 내린 채 침묵에 잠긴 나를 본 세트는 추가 설명의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그는 셰우트를 설명해주었을 때처럼, 되도록 쉬운 설명을 떠올리기 위해 고민하는 듯싶었다.
[셰우트가 단순한 그림자가 아닌 것처럼 이브도 단순한 심장은 아닌가 보네. 뭔가가 더 있어?]
“이브는 심장이지만… 인간과 우리의 심장은 달라. 우리의 심장은 카, 그 자체이다. 인간들과는 달리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영혼 덩어리이지. …성물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는지 기억나냐?”
[셰우트를 압축한 다음에, 카로 정제한다고 했던 것 같아.]
“그래. 너는 지금 호루스의 카를 흡수한 상태이고, 그 카는 성물 속 셰우트와 이어져 있다. 즉, 카를 온전히 다룰 수만 있다면 성물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성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거랑 심장이랑은 무슨 상관이야? 심장에 성물을, 그러니까 셰우트를 담을 수 있는 건가?]
의아한 표정으로 혼자 중얼거리고 있으니, 세트는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더 생각하면 답에 근접할 수 있을 것 같아,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골몰히 가설을 세워보았다.
일단 인간은 심장에 불순물이 섞여 있다. 아마 혈액 속 영양분들이 아닐까. 적혈구나 백혈구 같은 세포일 수도 있고…. 어쨌든 영혼을 비롯해 많은 것들이 흘러간다는 뜻이겠지. 반면 신의 심장은 ‘카’로 이루어진 영혼 덩어리이다. 인간처럼 혈액이 흐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혈액이 흐르더라도 영양분이나 세포가 포함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딱히 음식을 섭취하지도 않고, 바이러스 등에 감염되지도 않으니 불필요하겠지. 그렇다면 이 심장이 운반하는 것은 무엇일까. 심장이 영혼 덩어리라면, 그 영혼을 온몸으로 순환시키는 것일까? 세트가 그토록 강조하는 카를 순환시키는 역할일까? 이런 가정을 세운다면, 심장은 신의 기운이 밀집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능력을 사용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장기일지도 모른다.
좋아, 이제는 다음 가설로 넘어가 보자. 심장은 영혼 덩어리이고, 신의 기운으로 가득 찬 부위이다. 나에게 카가 있다면, 아마 그 시작점은 심장일 것이다. 카는 심장 박동에 맞추어 순환하겠지. 그러다 보면 머리카락에 스며든 호루스의 기운과도 만날 것이다. 호루스의 기운은 심장으로 내려오지 않는 것 같지만…. 어쨌든 내 카와 그의 카는 접촉한 상태이고, 원한다면 그의 카를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호루스의 카는 성물과 연결되어 있으니, 나는 성물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몇 달 전, 호루스는 허공에서 지팡이를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당시에는 흔한 판타지 소설처럼 아공간을 먼저 떠올렸는데, 그 아공간을 심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심장은 혈액순환을 위한 장기보다는 영혼 자체에 가까우니까, 성물을 저장한다면 물리적인 장기가 아니라 개념적인 영혼에 넣어야 할 것이다. …너무 모호한데.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둘째치고, 명확한 문장으로 비유하기조차 어려웠다. 굳이 따지자면, 지팡이 속 카를 내 머리카락에 넣은 것처럼 셰우트도 심장에 저장한다는 느낌일까.
‘카’라는 것이 형체가 없는 것처럼 성물도 형체를 없앨 수 있다는 가정은 어떨까. 성물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셰우트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성물은 셰우트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성물을 일시적으로 해체하여 셰우트 형태로 심장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생각을 조금 더 정리한 뒤, 성물을 셰우트로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세트는 반색하며 온갖 칭찬을 늘어놓았다. 정말 칭찬이 후하다고 생각하며, 칭찬 뒤 이어지는 설명에 집중했다.
“카를 넣어 셰우트를 성물로 만들었지. 그 과정을 반대로 하면, 성물은 셰우트로 바뀐다. 불완전한 상태의 셰우트는 흩어지지 않기 위해 카를 찾고, 우리는 이걸 이용해 셰우트를 심장으로 끌어들이는 거다. 다만, 셰우트에게 잡아먹힐 수 있으니 훈련이 필요해. 심장은 우리의 가장 큰 약점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간단한 설명으로 시작한 말은 경고로 끝났다. 세트는 겁을 주려는 듯 눈썹을 사납게 일그러뜨리며 어둑한 눈을 빛냈지만, 나에게는 큰 감흥이 없었다. 그저 ‘전쟁 신다운 표정이구나’ 따위의 생각만 들 뿐이었다. 이런 나를 보며, 그는 위협이 통하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허탈한 듯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아, 그가 어떤 심정인지 알 것 같다. 기껏 동화를 구연하며 ‘어흥’하고 호랑이 흉내를 냈는데, 그것을 보고 있던 5살짜리 꼬마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품이나 하는 거지. 왠지 조금 미안해졌다. 다음에는 겁먹은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지금 나는 호루스의 카를 흡수한 상태잖아. 이 지팡이에는 카가 없는 상태일 텐데, 어떻게 성물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거야? 진작에 셰우트가 돼야 했던 거 아냐?]
“근원을 가져갔지만, 자잘한 기운은 남아있어서 그래. 극소량의 카만 남아있어도 셰우트는 응집하거든. 카를 완전히 다룰 수 있게 되어 성물에 남아있는 기운까지 흡수했을 때, 성물은 셰우트가 되어 네 심장에 들어갈 거다.”
[결국은 또 훈련이네.]
“반복된 연습만이 실력을 쌓는 데 도움이 된다. …명심해라. 너무 무리해서는 안 되지만, 너무 쉬어서도 안 돼.”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쉬는 걸로?]
“…그래. 카를 흡수했으니 충분하지. 기대 이상이었어. 잘했다, 시륜. 푹 쉬어.”
세트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다소 투박한 손길이었지만, 힘 조절을 한 것인지 나름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으며 세트의 팔을 토닥였다. 세트가 한 것처럼 짧고 가벼운 접촉이었다.
[세트도 푹 쉬어. 아, 이따가 같이 산책하는 건 잊지 말고!]
“그래, 그래. 안 잊어버릴 테니 쉬고 있어라.”
그는 대충 손을 흔들며 신전 밖으로 나갔다. 언제나 그렇듯, 묘하게 설렁거리면서도 단호하게 딱딱 끊어지는 발걸음이었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무렵, 옆에 있던 나무에서 열매 하나를 따 물웅덩이에 빠트렸다. 열매에서 빠져나온 색이 물을 흐리게 만들었다. 나는 물들어버린 웅덩이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얕게 파인 발자국이 줄지어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