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망록

5화

14,913자

[샤, 너는 호루스와 세트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어?]

 

샤는 고개를 저었다. 샤도 나와 비슷한 정도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 친하지는 않은 사이. 그러나 서로의 평판을 깎아내리지 않고, 각자 할 일을 하다가 도와주는 사이. 호루스의 반응을 통해 무언가 과거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정보의 부재로 인한 답답함은 크지 않았다. 그들이 서로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어떤 관계이든 상관없기 때문이다. 궁금하지만 그저 호기심 수준의 흥미였다. 알게 된다면 좋고, 알지 못해도 괜찮다. 나와는 일절 관계없는 정보였다.

 

하지만 세트에 대한 정보는 필요했다. 다른 신들은 흑색의 망나니니 미치광이니 지껄였지만, 그들은 언제나 이상한 정보로 욕하는 족속이었으므로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는 불필요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질 좋은 정보였다. 호루스에게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가 회상하든 말든 그냥 물어보고 올 걸 그랬나. 이미 늦은 일이니 한숨을 내쉬며 길을 걸었다. 발밑의 모래가 사부작거리며 흩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세트의 능력이 모래를 다루는 것이었던가. 모래바람을 일으키는 사막의 지배자였던 것 같기도 하다.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말이다.

 

[세트는 어떤 신이야? 그러니까, 인간들의 기준에서.]

 

“인간들은 그를 아펩의 살해자라고 불러. 라가 태양을 지고 나아가는 동안 아펩과 맞서는 존재이지만, 위험하기에 쫓아내야 하는 신이야.”

 

[후자는 신들의 기준에서도 비슷한 것 같네. 하지만 전자는…. 아펩은 먼 옛날에 죽었고, 라도 이미 죽었잖아. 그럼 신의 입장에서 보는 세트는 그저 쫓아내야 하는 존재에 불과한 거야? 딱히 역할이 없지만 위험한 신?]

 

“대다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신들은 거대한 악이 사라졌으니 그 또한 변경으로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해.”

 

[만약 그 악이 다시 생겨난다면?]

 

샤는 대답하지 않은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멈칫하며 네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했다. 하찮은 엑스트라 신들은 아직도 그의 눈동자를 보며 악이라고 말하지만, 샤는 결코 그런 존재가 아니었으므로. 샤를 신경 쓰게 만든 것에 사과하며 말을 돌렸다. 내 궁금증보다는 샤를 상처입히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럼 너는 세트를 어떤 존재로 생각해? 아, 이왕이면 호루스에 대한 인상도 알려주라. 궁금해졌어.]

 

샤는 고민했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회색빛 실선이 그어진 적색 홍채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선 끝에 맺힌 빛 조각마저도 눈부셨다. 잠시간 숨 쉬는 것도 잊은 상태였다.

 

“세트는 혼돈이야.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가 가까워질수록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져.”

 

[이질적인 기운이라면 어떤…?]

 

“호수의 깊은 곳과 같아. 고대의 파편과도 같고, 너와도 같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인 신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인 것 같았다. 호루스에게서 느껴지는 신성함이나 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과도 다른 것일까? 그렇다면 세트는….

 

“저기 세트가 있어.”

 

앗, 세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잊어버리고는 샤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밝디밝은 신의 영역에서 홀로 어둠의 자식임을 표명하는 존재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내 것보다도 새까만 머리카락은 햇빛을 받고도 어두웠고, 눈동자는 모든 빛을 꺼트린 듯한 색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화려해지기 전의 캄캄한 우주 같았다. 그의 피부 역시 다른 신들보단 명도가 낮아 보였는데, 그 때문인지 칼을 꽂아도 꿰뚫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전쟁 신다운 풍모였다.

 

펭귄처럼 모여있던 신들은 그를 본 뒤 기겁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나였다면 신 무리를 피해가느라 빙빙 돌아서 갔을 텐데, 그는 그런 것 없이 일직선으로 걸어왔다. 마치 ‘내가 가는 길에 있는 것들은 알아서 사라질 것’이라는 당연한 명제를 지닌 것만 같았다. 확실히 저런 기세라면, 아무리 둔하고 멍청한 신일지라도 빠르게 피할 것 같다. 모세의 기적을 일으키며 나에게로 곧장 걸어오는 세트를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더러워서 피한다는 마음으로 참아왔지만, 그 똥 같은 신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는 꼴을 보니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근처까지 다가온 세트는 무척이나 컸다. 분명 다른 신들보다 작은 키로 설정했을 텐데…. 다른 신들이 설정보다 커지며, 세트도 함께 커졌나 보다. 여기에 있는 신 중 나와 샤만 작았다. 샤는 나중에 좀 더 커진다지만, 나는…. 눈물이 차올라서 고개를 들었다. 맑은 밤하늘의 오로라가 참 어여뻤고, 빛나는 햇살은 부드러웠다. 세상이 참 아름다웠다.

 

“네가 시륜이냐? 들었던 것보단 멀쩡한데.”

 

세트는 재수 없었다. 아니, 말이 헛나왔다. 그저 조금, 아주 조금, 신들이 왜 멀리하는지 알 것만 같아졌다. 그는 상당히 인터넷 소설에 나올 법한 대사를 내뱉었는데, 글이라면 모를까 현실에서 저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좋게 말하면 낯설고, 나쁘게 말하면 소름 돋았다. 물론 다른 신들도 그리 정상적인, 아니, 현대적인 말투를 쓰는 건 아니었지만, 세트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다.

 

[그럼 넌 세트야? 생각했던 것보다도 새까맣네.]

 

아, 실수했다. 잠시 이성의 고삐가 풀려버렸나 보다. 멈칫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는데, 다행히도 그리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세트는 그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나, 이거 뭔지 알아. ‘날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같은 장면이잖아. …아닌가? 하긴, 로맨스는 쏙 빠져있으니 다르긴 하겠네. 산으로 가는 생각을 붙잡기 위해 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음, 역시 반짝이네. 정신이 확 들었다.

 

[네가 날 데려갈 거라고 들었어. 겸사겸사 보호도 해주고, 음, 또 뭐 있었지? 아무튼, 도와준다고. 나는 모르게 진행된 일이지만, 호루스의 제안을 수락해줘서 고마워.]

 

“네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설마 그 녀석이 설명도 안 해줬냐? 여전히 자기만 아는 녀석이군.”

 

세트는 기다란 손가락을 들어 귓가를 두어 번 두드렸다.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곤란이나 당혹 등의 감정 표현이 아닐까? 그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고, 입매만 시원하게 휜 상태였다. 그 모습이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익숙하지 않은 표정인 듯 입꼬리가 슬슬 떨리고 있었다. 혹시, 내가 무서워할까 봐 저런 미소를 달고 있는 것일까? 도끼병처럼 사고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전쟁 신이 저리도 친절한 모습일 리가 없지 않은가. 내 편견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배려심이 있는 전쟁 신쯤으로 생각하는 게 마음 편했다.

 

“나는 네가 성장할 때까지 곁을 지킬 거다. 호루스 녀석이 가르치지 않은 것들도 전부 알려줄 거고, 널 방치할 일은 절대 없어. 널 홀로 두지도 않을 거다.”

 

원한다면 맹세라도 하지. 세트는 주먹을 쥔 채 자신의 심장 부근을 가볍게 쳤다. 무척 자신만만한 태도였고, 뱉은 말을 취소할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고 믿는 자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무척 믿음직스러웠다.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다가, 나 또한 입꼬리를 올렸다. 그와는 달리 매끄러운 미소였다.

 

[나는 성장하지 않을 거야. 나는 신들과 다르고, 내 모든 행동과 사상은 차라리 인간에 가깝겠지. 그래도 괜찮아?]

 

나를 감당할 수 있겠냐는 듯한 어조였다. 그를 시험해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는 수많은 자에 둘러싸여 있던 나에게, 새로 등장한 인물과 함께하며 버틸 수 있겠냐고 묻는 행위였다. 아마 그에게도 많은 것들을 숨기게 될 것이고, 그와 가까워질수록 더 외로워질 것이다. 신들과의 괴리감은 더 커질 것이고, 이는 세트와의 관계에서도 같을 것이다. 신들과 나는 다르고, 세트와 나는 다르다. 하지만 만약, 세트가 신들과 다르다면, 그가 내 행동을 한심하게 여기지 않고 받아들여 준다면, 그때에는 또 다른 관계가 펼쳐지겠지. 나는 그 ‘만약’을 확인하고 싶었다. 외로움이 덜어질 가능성이 있는지, 조금쯤 기대해보아도 좋은지 알고 싶었다.

 

“네가 다른 녀석들과 다른 건 당연하다. 그 녀석들은 어쭙잖은 능력으로 으스대지만, ‘진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너는 그 ‘진짜’가 될 수 있어. 우리는 언제나 널 기다려왔다.”

 

만약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상관없어. 영영 성장하지 않아도 좋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고, 네가 싫다 해도 계속 곁에 머물 테니까.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을 텐데도, 그는 그렇게 말했다. 말을 마친 세트는 씨익 웃었다. 아까와는 달리 자연스럽고 시원한 미소였다.

 

세트의 말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꽤 감동적이기도 했다. 내가 무슨 존재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의 말은 외로움을 녹이는 효과가 있었다. 왜, 그렇지 않은가. 힘든 상황에서 ‘괜찮다’라는 말이 많은 위로가 되어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어떤 의도로 한 말인지는 몰라도, 내 속은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것으로 가득 찼다. 이곳에 온 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너는 다르구나.]

 

아는 것 없이 떠드는 멍청한 족속들과는 달라. 보호해주겠다고 말했으면서 홀로 지내게 만든 멍청이와도 다르고. 날 행복하게 만들지만, 결코 기댈 수 없는 아이와도 다르지. 뒷말은 모두 삼킨 채 환히 웃었다. 어쩌면 그는, 이곳에서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첫 번째 신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세트. 너는 어떻게 내 말을 알아듣는 거야? 보통은 못 알아듣던데.]

 

하지만 그 전에 이 질문을 던져야 했다. 그는 샤가 통역하기도 전에 내 말에 답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 언어를 이해한 것은 디아와 샤 뿐이다. 신들의 대표자라는 호루스도 이해할 수 없던 언어를, 어떻게 세트가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냥 들리던데. 나도 네 소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의지는 전달되고 있어. 이 머릿속으로 말이지.”

 

세트는 검지로 자신의 옆 머리를 가리켰다. 그의 행동을 가만히 보고 있던 나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나에게 들려오는 저들의 언어가 자동 번역되어 머릿속에 박히는 것처럼, 세트도 비슷한 과정으로 내 말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자동 번역기는 어떤 조건으로 주어진 것일까? 디아, 샤, 세트의 공통점이 있을까? 다른 신들과는 다른, 그들만의 특징이 있을까?

 

디아는 차원을 관리하는 존재이니 온갖 언어를 이해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해하지 못하는 게 더 어색할 것이다. 샤는… 주인공이니까. 신들이 다 죽은 뒤에도 영생을 살아갈 존재니까. 그런 면에서 차별점을 둘 수 있다. 주인공 대 작가로서 의사소통할 수 있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트는 어떤 점이 특별한지 짐작할 수 없다. 이전 세대의 신이지만 지금까지도 살아있다는 점? 특이하다면 특이하지만, 나와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다. 만약 내가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면, 그리고 그 바깥에 나를 설정한 존재가 있다면. 그는 무엇을 바라고 이런 장치를 두었을까?

 

여러 가설을 세워보려 했으나 머릿속 회로가 꼬이는 듯하여 그만두었다. 관자놀이를 꾹 눌러 지압하며, 다시 세트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쨌거나 그와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은 상당한 이득이니 말이다. 몸짓을 통하지 않고도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상대가 하나 늘었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

 

세트는 나를 데리고 자신의 신전으로 이동했다. 순간이동 대신 두 발로 걸어서 간 탓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세트는 내 명치까지 올라오는 긴 다리를 자랑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축지법을 쓴 듯 순식간에 걸어갔다. 처음에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따라가려 했는데,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후다닥 달려가 세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이내 상황을 알아차린 듯 짧게 사과하며 걸음을 늦추었다. 이제야 속도가 맞춰졌다.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그의 옷자락을 놓아주었다. 그의 발을 힐긋 내려다보니, 전과는 달리 어색한 걸음걸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세트는 느리게 걷는 것이 처음인 사람처럼 굴었다. 금방이라도 멀찍이 튀어 나갈 것 같은 발에 힘을 주어 통제하고, 바로 앞의 땅에 천천히 내려두는 모습이었다. 하긴, 그가 언제 상대방의 보폭에 맞추어 걸었겠는가. 상대보다 빠르게 달려나가는 것이라면 모를까, 천천히 걷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그가 뭐라 불만을 토로하지도 않고 금방 발걸음을 늦추다니. 나에게는 무척 큰 배려로 느껴졌다. 당장 호루스만 해도 ‘내 걸음에 네가 맞추어라’라는 느낌이 강했으니 말이다. 이를 생각하니 간지러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세트의 신전은 꽤나 화려했지만, 오랫동안 방치된 장소 특유의 싸늘함이 맴돌았다. 체온을 빼앗기는 듯한 감각에 몸을 떠니, 세트는 손을 휘휘 저으며 무언가를 조정했다. 그의 손끝에서 퍼져나간 온기는 신전 전체를 감싸 안았다. 신전은 더 이상 싸늘하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듯 따스한 기운이 가득했다. 나는 기적을 목격한 것처럼 입이 벌어졌다. 우주를 보았을 때조차 이보다는 놀랍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래도 더 피부에 와닿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신의 영역이라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본래 가진 능력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척 유용해 보였다. 특히 겨울에 사용할 수만 있다면 전기세가 절약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까지 그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가정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온기는 신전의 중앙으로 향할수록 미약해졌다. 점차 음산한 기운이 맴도는 것만 같았다. 나는 세트의 옆에 붙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말 이상한 말이지만, 지금 향하는 곳에 귀신이 가득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설마하니 신전 내부에 그런 것이 존재할 리는 없겠지만…. 내 예감은 언제나 틀렸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믿으며 세트의 팔을 붙잡았다. 일단은 안심할 만한 온기가 필요했다. 세트는 나를 쳐다보거나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팔을 움직여 내 어깨를 감쌌다. 아까 전 느꼈던 온기보다도 뜨거운 체온에 긴장이 풀리는 듯싶었다. 속에 들어간 차가운 공기를 한숨처럼 내뱉은 뒤, 두 손을 모아 만지작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세트의 신전은 여러모로 호루스의 신전과 달랐다. 온도의 얘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것이 다른 느낌이었다. 호루스의 신전은 전체적으로 밝고 따스하며, 금빛 햇살이 생명을 불어넣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여러 광물로 꾸며져 있어 화려하지만, 사람이 사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반면 세트의 신전은 차갑기 그지없다. 세트가 온기를 불어넣긴 했지만, 곳곳에 숨은 음기가 스멀스멀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중앙으로 갈수록 강해지는 기운은 불길하기까지 했고, 지금까지 별 두려움 없이 지내던 나를 겁먹게 했다. 그 기운과는 반대되는 세트가 있으니 이렇게 걸어가는 것이지, 혼자였다면 절대 들어가지 않았을 장소였다.

 

[…괜찮은 거야? 점점, 점점 이상해지는데.]

 

“…조금만 참을 수 있겠냐? 저기에 들어가야 이곳을 바꿀 수 있어서.”

 

이럴 줄 알았다면 잠시 바깥에 둘 걸 그랬나…. 한탄하는 그의 미간은 잔뜩 구겨진 상태였다. 그는 입술을 힘주어 다물고는, 나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처음 신전에 들어왔을 때처럼 몸이 떨렸다. 피부에 닿는 공기는 그리 차갑지 않았지만, 숨을 들이쉴 때마다 얼음을 삼킨 듯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세트의 체온이 그나마 나를 버티게 했다.

 

신전의 중앙은 텅 비어 있었다. 호루스처럼 조각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예전에 방문했던 눈의 신전처럼 제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오랜 세월이 지나며 온갖 유물이 소실되고, 그 뼈대만이 남은 유적지 같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했길래 이 모양이 되었을까? 그런 생각도 잠시, 조금 전보다도 거센 냉기가 몰려왔다. 숨쉬기가 버거운 것은 물론, 이제는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저절로 허리가 굽어지며 부족한 숨과 온기를 갈구하게 되었다. 세트가 급히 움직여 나를 부축했지만, 그로는 부족했다. 나는 얼어붙은 것 같은 몸을 가눌 수 없었고, 그에게 기댄 상태로 가만히 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여름 옷차림으로 냉동실에 들어간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얼른 세트가 조치해주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젠장. 눈은 감지 말고 기다려. 빨리 끝낼 테니까, 정신 바짝 차리라고.”

 

알았으니까 빨리 해결해. 이러다 나 죽겠다…. 뇌세포까지 얼어붙은 것인지, 슬슬 생각도 끊기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지 말랬으니까 일단은 최선을 다할 거지만, 인간적으로 너무 추웠다. 딱딱 소리를 내며 떨리는 이를 악물고 세트에게 파고들었다. 아, 제발 빨리 뭐라도 좀 해봐. 너는 튼튼하지만 나는 약골이라 죽을 것 같다고. 수족냉증도 심한데, 아, 물론 이 몸뚱이는 원래 내 몸과 다르겠지만. 그래도 추운 건 추운 거란 말이야…. 기분 나쁘고 추워…….

 

세트는 한 손으로 나를 감싸 안은 채, 다른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의 손길에 따라 허공이 갈라졌는데, 그때마다 무언가 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다. 굳이 따지면 악마가 제령 당할 때 내는 비명 같은…. 칠판을 손톱으로 긁었을 때 나는 소리와도 같았다. 안 그래도 추운데 소름 돋기까지 하니 죽을 맛이었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아 속으로 같이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 차라리 기절시켜달라는 생각이 들 때쯤, 세트는 무언가 잡는 시늉을 했다. 그의 손에는 검은색 끈 같은 것이 붙잡혀 있었는데, 그 끝에는 불그스름한 광석이 달려 있었다. 내가 삼켰던 파편과도 같은 색이었다. 세트는 나를 잠시 떼어놓더니,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었다.

 

“임시방편일 뿐이지만 없는 것보단 낫겠지.”

 

그는 끈의 양쪽을 잡은 뒤, 그것을 내 목에 몇 번 둘러주었다. 이제 됐다며 몸을 일으킬 때는 추위도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푸르게 변했던 손끝이 혈색을 되찾는 걸 보며, 여러 번 손을 쥐었다 펴며 저릿한 근육을 풀었다. 차가운 공기를 전부 내뱉고 따뜻한 공기를 최대한 삼켰다. 굳어버린 머리도 이제야 돌아가는 듯했다.

 

[이건 뭐야? 아까 그 기운은?]

 

세트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낯이었다. 잠시 침음을 내던 그는 내가 떨어트렸던 지팡이를 주워주었다. 답을 회피하는 것인지 의심이 들어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그는 자신감 넘치던 태도는 어디로 갖다 버린 것인지 시선을 피했다. 내 눈치를 보듯 어깨도 조금 움츠러든 상태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친절히 알려주었다.

 

[안 알려주면 하루종일 이러고 있을 거야. 오늘 안에 답하지 않으면 몇 날 며칠이고 계속.]

 

내 성정에 대해 말하니 멈칫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작게 중얼거리기도 했는데…. 음, 협박이냐고 하는 것 같다. 협박으로 들렸던 걸까? 딱히 그러려던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들렸다면 협박이겠지. 나는 뻔뻔한 태도를 취하며, 얼른 말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세트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건 알고 있지? 주인이 떠난 신전은 셰우트로 가득 찬다. …셰우트가 뭔지 모른다고? 그 녀석은 널 얼마나 내버려 뒀던 거냐…….”

 

세트는 골치 아프다는 듯 푹 파인 미간을 매만지며 한탄했다. 혼자 고개를 흔들기도 하고, 무언가를 생각하듯 재차 침음을 내기도 했다.

 

“영혼이 다섯 가지로 나뉘는 건 알고 있겠지? 그래, 카는 알고 있다고? …괜찮아. 전부 알려줄 테니까.”

 

자존심 상하는 말투이긴 했지만,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건 사실이니 조용히 넘어갔다. …나는 이런 것도 모른 채, 어떻게 글을 썼던 걸까? 분명 자료조사를 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시험이 끝나면 공부했던 것을 모두 잊어버리듯, 글을 쓴 뒤 모든 자료를 잊어버린 것일까. 애써 그럴듯한 추리를 하며 그의 설명을 들어보았다.

 

이곳에서는 영혼을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눈다. 렌, 바, 카, 셰우트, 이브. ‘렌’은 이름으로써, 이름이 오래 불릴수록 오래 산다고 믿는 것 같다. 신들에게 비밀 이름이 있는 것과는 모순인 것 같은데…. 뭐,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니 넘어가기로 했다. ‘바’는 인격과도 같은 것인데, 사람이 죽은 뒤에도 몸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카’는 내가 아는 영혼과 같은 개념이다. 생명 그 자체로써, 사람이 죽으면 몸을 떠난다. ‘셰우트’는 그림자이고, ‘이브’는 심장이다. 사람들은 죽은 뒤 심장의 무게를 재어 죄를 측정한다고 믿기에, 이브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그밖에도 육신은 ‘하’라고 부르고, 카와 바가 합쳐져 부활한 것은 ‘아크후’라고 부른다.

 

확실히 어디선가 들어본 내용이었다. 자료조사를 하며 정리해두었던 기억이 난다. 설명해보라고 하면 설명할 자신은 없지만 말이다. 어딘가에 적어두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최대한 오래 기억하기 위해 여러 번 되뇌었다. 렌이 이름, 바는 인격, 카는 영혼, 셰우트가 그림자, 이브는 심장. …그런데 원래 무슨 말을 하다가 이런 설명을 듣게 된 거였지? 멈칫하며 세트를 바라보니, 그는 내가 전부 이해했다고 생각한 듯 열심히 다른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어어, 이해는 했지만, 그거 아니야…. 뭐 때문에 이러고 있던 건지 알려줘…….

 

“인간은 셰우트를 그림자로만 여기지만, 우리는 이를 ‘눈의 조각’이라 불러. 셰우트는 신이 될 뻔한 것들이 조각나 흩뿌려진 것. 그림자로 표현된다 해서 그게 전부는 아니야.”

 

아, 셰우트 때문에 시작한 설명이었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궁금증이 풀렸음을 표현했다. 세트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림과 동시에 어두운 눈동자를 빛냈다.

 

“셰우트는 모든 존재에게 있지. 인간, 동물, 식물, 심지어는 우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만물에 심어진 눈의 조각은 그것이 죽든 살든 사라지지 않고, 그것이 무로 돌아간 다음에야 사라진다. 아니, 새로운 숙주를 찾는다고 보는 편이 맞을까.”

 

[죽은 사람도 그림자는 있으니까…. 죽은 사람이 썩어서 흙이 되어야 사라지는 거지. 하지만 흙도 그림자가 있으니까, 그림자가 사라졌다기보단 형태만 바꾼 것에 가깝고.]

 

“정확해. 게다가 셰우트는 빛이 없을 때도 사라지지 않아. 그림자가 사라진다 해서 셰우트가 사라지진 않지.”

 

[그건… 뭐라 해야 하지. 어둠 속에도 그림자는 있다는 느낌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세트는 정답이라는 듯 시원하게 웃고는 기특한 학생을 보듯 쳐다보았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신이 사라졌을 때 신전에 셰우트가 가득 생긴다는 건 이해할 수 없어. 그림자는 언제나 몸에 달라붙어 있잖아. 그렇다면, 오히려 셰우트가 사라져야 하는 거 아냐?]

 

“다시 말하지만 셰우트는 눈의 조각, 신이 될 뻔한 것들이다. 우리가 있을 때는 그림자처럼 지내지만, 자리를 비우면 신전을 차지하기 위해 발악하지.”

 

신전이 있다고 전부 신은 아니지만, 신전 없는 신은 존재할 수 없으니. 세트는 무감한 어조로 덧붙였다. 마치 주변인 중 그런 신이 있던 것처럼 익숙해 보이기도 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되다 만 것들이 날 이길 순 없어.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 절대로. 그 누구도 날 이길 순 없다.”

 

내가 설정했던 전쟁 신 세트답게 자신감 넘치는 태도였다. 자만심으로 느껴지지 않은 것은, 실제 그의 능력이 뛰어남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른 신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고대의 존재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고대의 신이니까, 저 정도의 말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까 들린 괴상한 비명은 셰우트가 낸 거였어?]

 

“그래. 셰우트를 적당히 찢어놓고, 좀 커다란 놈들은 압축했다. 네 목에 걸린 게 압축한 모습이고.”

 

그는 슬쩍 턱짓하며 내 목에 감아놓은 끈을 쳐다보았다. 거울이 없어 어떤 모습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붕대처럼 묶여 있지 않을까. 천천히 더듬어보았지만, 그저 평범한 끈의 촉감이었다. 얼굴에 의아함이 드러난 것인지, 세트는 웃음을 참는 듯 떨리는 입꼬리를 가린 채 헛기침을 했다. 아니, 너 이미 들켰는데….

 

[아까는 죽을 것처럼 추웠는데, 이건 전혀 차갑지 않아. 그냥 평범한 천 같아. 왜 그런 거야?]

 

“압축하면서 내 기운을 넣어서 그래. 신에게 눌린 셰우트는 성물이 되거든.”

 

[…이거 성물이었어? 성물은 다 그런 식으로 만드는 거야?]

 

“그럴 리가. 그건 급하게 만드느라 별 기능이 없어. 고작해야 셰우트에게서 보호하는 정도? 보통은 수십 년에 걸쳐 셰우트를 가공하지. …호루스의 지팡이를 만드는 데 130년이 걸렸던가?”

 

다른 녀석들도 꽤 탐내는 성물이라고. 설마 너한테 넘길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그리 덧붙여진 말에 기겁하고 말았다. 내가 들고 있는 이 지팡이가 130년짜리란 말이지…? 그것도 다른 신들이 탐낼 정도의…? 갑자기 신들의 욕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 같아도 갓난아기에게 수십억의 유물을 사준다면 경악하며 그 사람의 머리를 의심할 것 같다. 아니, 누가 이런 엄청난 것을 주냐고.

 

[혹시 샤가 쓰고 있던 건…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알아?]

 

“아, 그것도 100년 정도 걸렸지. 쓰지도 않을 성물을 만든다고 꽤 비난받았을 거다.”

 

이쪽도 만만치 않았다. 만드는데 130년과 100년이 걸린 성물…. 세트가 몇 분 동안 대충 만든 물건조차도 불길한 기운을 모두 몰아낼 정도로 강한데, 그렇게 공들여서 만든 것들은……. 더 이상 생각하면 안 될 것 같다. 뭔가 많은 기능이 있겠지. 응, 그럼 그럼. 애써 제작 기간을 머릿속 창고로 밀어 넣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나저나 셰우트라는 건 무한히 생겨나는 걸까? 성물을 만들 때마다 셰우트를 압축해야 한다면, 결국 셰우트는 사라지지 않나? 자원고갈에 대한 의문이 생겨 물어보니, 세트는 무척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죽어버린 녀석의 신전에 가면 된다. 주인이 없으니 셰우트가 금방 생겨나거든. 제일 유용한 곳이 아펩의 신전이고, 그다음이 눈과 라의 신전인가.”

 

무척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악하다며 욕하면서도 이용할 건 이용한다는 거겠지. 눈과 라는… 뭐, 지금의 신들과 비슷한 편에 섰을 테니 상관없고.

 

[그 신전들은 어디 있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엄격히 통제되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 공간 자체가 분리돼서 보통의 녀석들은 찾지도 못해. 장소를 아는 건 기껏해야 호루스와 아누비스, 세크메트 정도려나.”

 

물론 나도 알고 있지. 세트는 팔짱을 끼며 눈꼬리를 휘었다. …눈까지 웃는 건 처음 아닌가? 왠지 신나 보이는 표정이라, 조금 더 맞장구쳐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그보다는 내 의문을 푸는 게 먼저였다.

 

[그 신전들은 전부 별개의 공간에 있어? 그러니까, 음, 아펩의 신전이 따로 있고, 눈의 신전이 따로 있고, 이런 식이야?]

 

“그래. 공간은 전부 분리된 상태다. 세 신전을 모두 아는 건 나와 호루스뿐. 아누비스나 세크메트는 아펩의 신전을 모를걸.”

 

[그럼 너랑 호루스는 언제든 신전에 갈 수 있는 거야?]

 

“다른 신전은 괜찮지만, 아펩의 신전은 좀 준비하고 가야 해. 셰우트 말고도 걸리적거리는 것들이 많아서…. 호루스는 아펩의 신전에 못 들어갔던가?”

 

[호루스가 못 들어갔다고?]

 

“그 녀석은 제대로 된 태양이 아니니까. 성물을 전부 들고 가지 않는 한은 무리다.”

 

호루스가 제대로 된 태양이 아니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다른 신들이 그를 욕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성장이 끝난 성체이지만 어리다며 무시당하는 호루스, 푸른 태양이지만 제대로 된 태양은 아닌 호루스. 성장 과정에서 잘못된 일이라도 있던 걸까? 아니면 라의 후계자로서 공표될 때 사고라도 터졌던 걸까? 궁금증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애써 눌러 담으며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럼 아펩의 신전에 갈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지금으로선 그렇겠지. 모든 걸 나한테 떠넘기는 버릇도 고쳐야 할 텐데.”

 

세트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하면서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그의 기쁨과 뿌듯함을 드러냈다. 누가 맡긴 임무인지는 모르겠지만, 세트는 무척 만족하고 있는 것 같다. 그에게 일을 시킬 만한 신은 호루스뿐이니…. 그는 호루스를 아끼고 있는 것일까?

 

“며칠 전까지도 신전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호루스가 바로 앞까지 찾아와서는 간곡한 말투로 부탁하더라.”

 

[아, 나를 맡기고 싶다고?]

 

“그래. 그 녀석한테 둘이나 돌보라고 했다간 너희의 성장이 더뎌질 것 같아서 수락했지. 육아에는 영 소질 없는 녀석이라 못 미덥거든.”

 

앗, 조금 너무한 발언이지만 맞는 말이다. 호루스는 하나만 키우기에도, 아니, 교육이 더 적절한 단어인가. 어쨌든 그는 샤 하나만을 교육하기에도 바빠서 나를 방치해 두지 않았던가.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게 되는 말이었다.

 

[그나저나 아펩의 신전을 정리하고 있었다는 건 무슨 뜻이야? 음…. 비밀 임무 같은 거라면 대답 안 해도 돼.]

 

지금까지도 엄청난 비밀을 들었던 것 같지만, 앞으로의 내용이 더 큰 비밀일 것 같아서 붙인 문장이었다. 오랫동안 신의 영역에 돌아오지 않은 세트는 대체 뭘 하고 있었을까. 계속 셰우트만 처리하고 있었을까? …그건 너무 지루한 작업이지 않나. 명색이 전쟁 신인데, 저런 반복 작업만 했을 리는 없다. 그런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셰우트 말고 걸리적거리는 것들이 있다고 했지? 그것들은 ‘아펩의 비늘’이라고 부르는데, 신만 보면 죽일 듯이 달려들어. 성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별 쓸데도 없지만, 셰우트보다 저항이 거세서 성가신 편이고. 비늘 하나에 며칠이 걸리는 수준이니, 쌓였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 되겠지. 그것들을 전부 찢어서 회복하기 어렵도록 만드는 게 내 일이자 사명이다.”

 

세트는 가벼운 어조로 말했지만, 그 내용은 조금 무서운 분위기였다. 이름에 아펩이 들어간다는 것부터 공포영화의 시작 같았는데, 하나를 처리하는 데 며칠이나 걸린다니. 심지어 신전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세트뿐이니, 저것들을 처리할 수 있는 것도 세트밖에 없다. 만약 세트가 죽는다면 저 일은 누가 맡아야 하지? 설마 고대 신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유는 저 무서운 사명을 다해야 하기 때문인 걸까? 아니, 잠깐.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나한테 해도 되나? 아직 연꽃에서 나온 지 몇 달밖에 안 된 사람한테 자신의 사명을 알려줘도 돼?

 

[그, 있지. 혹시 나한테 이런 설명을 자세히 해주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다른 신들은 이런 전말을 모를 거 아니야. 나한테 알려주는 이유라도 있어?]

 

“너는 고대의 파편을 삼켰으니까. 최초의 연꽃에서 태어나기도 했고….”

 

[설마 네 사명을 이으라는 건 아니지?]

 

상상만 해도 끔찍한 문장이었다. 나는 내 상상에 경악하며 그의 말을 끊고 질문했다. 그는 말이 잘렸음에도 불쾌함 하나 표현하지 않고, 그저 안심하라는 듯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 사명을 너에게 넘길 생각은 없다. 너는 너의 사명만 다하면 돼. 다만…. 언젠간 사명을 다한 내가 죽었을 때, 모든 일을 파악하고 있는 존재가 하나쯤은 있었으면 해서.”

 

그러니 넌 내 후계자 같은 거다. 세트는 쓴 것을 물었을 때처럼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숨과도 같은 문장을 내뱉었다. 어쩐지 외로워 보이는 낯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