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망록

4화

11,943자

호루스와 이야기를 나눈 지도 몇 주가 지났다. 그는 샤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었고, 그에 따라 내가 홀로 있는 시간도 늘어났다. 그들과 함께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고독함이 밀려왔다. 저들은 원작 속 인물, 나는 그 바깥의 인물. 저들은 이집트의 신, 나는 한국의 인간. 저들은 과거의 존재, 나는 미래의 존재. 다른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나는 저들과의 공통점이 없었고, 무리에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나는 분명 샤와 호루스에게 애정을 품고 있고, 나와 그들 사이에는 몇 달 치의 친분도 쌓여있다. 하지만 그들은 점차 바빠졌다. 호루스는 샤를 후계자로 키우려는 양 온갖 것을 전수했고, 샤는 그 모든 것을 빠르게 습득했다. 나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신으로서의 능력을 키워나가는 동안, 신도 인간도 아닌 나는 그저 멈춰있을 뿐이다. 그들이 나를 아무리 챙겨주려 해도 본질적인 간극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 나는 외로웠다. 대화할 상대가 필요했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대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나는 미래에 있을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내가 숨기고 있는 수많은 비밀에 대해 털어놓고 싶었다. 동등한 상대가 필요했다. 작가와 등장인물 간의 관계가 아니라, 조금 특이한 존재와 평범한 신 간의 관계가 아니라. 그저 인격체 대 인격체로서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다.

 

호루스는 내가 아는 정보를 잊으라고 말했다. 이용할 수 없다면 숨기고, 숨길 수 없다면 잊으라고. 하지만 그 조언은 지킬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서술한 원작은 이 세계에 비해 적은 분량이었고, 알지 못한 틈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 불확실한 것을 믿고 이용하기에는 내 능력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숨기려 했으나, 결과는 지금과 같다. 외롭고 고독하고 우울하다. 계속 깊은 바다로 잠겨가는 것처럼 숨이 막힐 때도 있다. 인간으로서 살았던 짧은 인생에서 경험한 가장 큰 우울감과 맞먹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하여 원작을 잊을 수도 없다. 그것을 묻어두기엔 미련이 가득했다. 애당초 이곳에 떨어진 뒤 적응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던 것은 원작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던가. 이를 잊으면, 내가 굳이 이곳에 있어야 할 필요도 사라진다.

 

딜레마였다. 디레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면 원작을 기억해야만 한다. 원작을 기억한다면 나는 끊임없이 시험에 드는 기분이 될 것이다. 누구에게도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다는, 끔찍한 우울감에 빠질 것이다. 게다가 신화시대가 끝날 때까지는 2천 년이라는 세월이 남았다. 인간인 나는 결코 버틸 수 없는 시간이다. 이를 상기하면 차라리 다 포기하고 싶다는 무력감에 빠진다. 원작도 잊어버리고, 어떻게든 디아를 만나 돌려보내 달라고 빌게 될 것 같다. 그는 분명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고, 그 대답을 들은 나는 절망에 빠질 게 분명하다. 그러니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이다.

 

만약 원작을 잊는다고 하더라도 걸리는 것은 많다. 원작을 잊어버리려 한다면 내가 이곳을 만들었다는 사실도 묻어두어야 한다. 아예 이곳의 신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인간으로서 살아온 시간 전부를 버리는 셈이 아닌가. 신의 입장에서는 보잘것없는 짧은 인생이겠지만, 나에게는 지금의 자아를 형성해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먼 훗날까지도 기억하고 싶은 기억이었다. 이를 지탱하려면 내가 이곳의 작가임을 잊지 말아야 하고, 결국 호루스의 조언은 지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문득 떠오른 위험한 생각에 몸서리치며 문장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아무리 미래가 암울하다고는 해도 벌써부터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많은 경우 걱정했던 일은 현실이 되지 않는다. 언제나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먼 미래까지 과도하게 걱정하며 우울증을 키워왔던 나로선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지금 하는 생각은 미래를 대비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나를 힘들게 만들 뿐이었고, 아마 큰 확률로 쓸모없는 걱정이 될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원작을 잊든 잊지 않든, 호루스의 조언을 따르든 무시하든. 지금의 나는 결정할 필요가 없다. 아직은 머나먼 일이고, 지금의 나는 외로움만 해결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쭉 뻗었다. 근심을 털어버린 사람처럼 가볍게 기지개를 켠 뒤, 언제나 그랬듯 신의 영역 전체를 돌아다녔다. 엑스트라들의 술렁거림은 무시한 채 열매도 먹고, 연꽃이 떠다니는 호수도 바라보았다. 괜스레 지팡이를 휘두르며 무게를 측정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참 훈련하고 있던 샤와 호루스를 만났고, 무거운 감정은 모두 떨쳐버린 채 웃으며 대화했다. 그들은 여전히 나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

 

외로움과 싸움하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지나갈 때면 항상 내 욕을 하던 신들이 조금 달라졌다. 그들의 욕을 배경음악 삼아 산책하려 했는데, 그들이 욕하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였다.

 

“그자가 돌아온다던데… 정말일까요?”

 

“푸른 태양은 아무 말도 없지 않았나.”

 

“그들은 사이가 안 좋지 않습니까! 흑색의 망나니가 돌아온다니, 불길한 징조입니다.”

 

“미치광이를 내버려 두는 건 대체 무슨 속셈이지? 그의 카를 빼앗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소.”

 

“푸른 태양도 당해낼 수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자는 이전 세대이니까요.”

 

나를 욕할 때와는 달리 약간의 떨림이 들어간 어조였다. 꼭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말이다. …나는 만만했다, 이거지.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내가 무능한 것은 사실이니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저 ‘흑색의 망나니’ 혹은 ‘미치광이’가 누구냐는 사실이다. 조금 더 들어보려 했으나, 내가 엿듣고 있음을 눈치챈 신들이 흩어져버려 뒷이야기를 들을 수 없던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흑색의 망나니. 검은색 머리카락이나 눈동자를 가졌다고 했을 때 떠오르는 것은 세트였다. 내가 외관을 설정해두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고, 디레와 자주 다투긴 했지만 나름 친우로 여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미치광이라 불릴 정도였던가? 망나니라면 나름 어울리는 것 같긴 하다. 다른 신들과는 달리 덜 온화하고 덜 자애로우며, 전쟁을 자주 벌이고 다닌다는 설정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신들의 전반적인 설정이 틀어진 와중에 그의 설정이 그대로일 것 같진 않지만.

 

그가 세트이건 아니건, 저 짜증 나는 신들이 욕하는 존재라는 사실만으로 내 호감을 사기엔 충분했다. 나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호루스의 지팡이를 땅에 꽂은 뒤, 몸을 기울여 지팡이에 무게를 실었다. 가만히 턱을 괴고 지팡이와 함께 몸을 흔들며 잠시간 고민했다. 호루스에게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할지, 아니면 몰래 만나러 갈지. 전자가 더 안전한 선택지 같았지만, 신들의 말에 따르면 호루스와 흑색 망나니는 대립하는 사이였으므로 호루스가 거절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반면 후자는 안정성의 면에서 탈락이었다. 지팡이가 보호해준다고는 하나 어디까지 지켜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것에 목숨을 걸기에는 다소 위험한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전자를 택하기로 했다. 호루스가 거절한다면 그때 후자로 변경해 몰래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지루함이 조금 사라질 것 같다는 예감에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기대감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가벼운 발걸음을 떼었다.

 

-

 

호루스는 신전 앞에서 시위라도 하듯 술렁거리는 신들을 막아서는 중이었다. 신들은 그동안의 위엄을 버리기라도 한 건지, 잔뜩 찌푸려진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술에 취한 사람보다도 더 큰 동작으로 팔을 휘둘렀고, 그에 반응하듯 주변에는 자잘한 스파크가 튀었다. 호루스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 하면 그들은 더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정말이지, 신이라고 믿고 싶지 않을 지경이다.

 

[호루스. 이게 무슨 일이야?]

 

나보다 머리 두 개씩은 더 큰 것 같은 덩치들을 뚫고 지나갔다. 힘겹게 호루스의 옆에 선 뒤, 그의 옷자락을 잡고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는 나의 말을 알아듣진 못하지만 눈치는 빠르므로, 어느 정도 의사전달이 될 것이라 믿으며 말이다.

 

“신전 안으로 들어가 있어라. 샤—가 설명해 줄 거다.”

 

그는 조금 화가 난 듯 눈가를 사납게 한 상태였지만, 나를 보며 누그러뜨리려 노력했다. 화를 눌러 참는 것인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뱉는 말에, 그를 건드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호루스가 말했던 것처럼 신전 안에는 샤가 기다리고 있었다. 햇빛을 받지 않았음에도 빛나는 서클릿과 그의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어쩐지 압도되는 듯한 기분에 멈칫하니, 샤는 평소처럼 부드럽게 풀린 얼굴로 다가와 손을 감쌌다.

 

“왔구나. 너에게 설명할 것이 많아.”

 

샤는 신전의 중심으로 나를 안내했다. 거대한 석상 앞에서, 샤는 무언가를 읊조렸다. 주문 같기도 하고, 별 의미 없는 속삭임처럼 들리기도 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공기의 떨림, 귀로는 들리지 않지만 본능이 알려주는 소리.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샤의 속삭임이 끝나버렸고, 잡을 뻔했던 무언가도 놓치고 말았다.

 

아쉬움은 잠시였다. 석상은 진동하며 움직였고, 그 밑으로 감추어져 있던 계단이 드러났다. 판타지다운 설정에 감탄하며, 샤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얼마나 걸었는진 알 수 없지만, 꽤나 깊이 내려온 것 같았다. 언제나 따뜻한 지상과는 달리 서늘한 온도였다. 잠시 몸을 떨며 지팡이를 꽉 끌어안았다. 마음 같아서는 샤를 안은 채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내 체온으로 인해 미적지근해진 지팡이가 난로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내가 이러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알면서도 모른 척해준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샤와 나는 거대한 공간에 도달했다. 중앙에는 열매가 맺힌 거대한 나무가 있었고, 그 주변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체온을 뺏어가려는 듯 서늘하던 공기는 어느샌가 따뜻해진 상태였다.

 

“여기는 최고 신에게만 알려지는 공간이야. 먼 옛날에는 눈과 라가 머물렀고, 지금은 호루스가 관리하는 곳이야.”

 

[너랑 나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

 

“호루스의 성물과 대대로 전해지는 주문. 그것으로 자격을 증명했어.”

 

[아까의 그건 호루스가 알려준 거였구나.]

 

샤를 후계자처럼 여기는 것 같긴 했지만, 벌써부터 이런 것을 알려줄 줄은 몰랐다.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신에게 최고 신의 권한을 누리게 하다니. 그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빛과 희망’이라는 이름에 모든 것을 걸기라도 한 걸까. 어찌 되었건 나쁜 일은 아니었다. 샤를 이만큼이나 비호한다는 증거이니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음…. 그래서 샤, 나에게 설명해줄 게 뭐야? 이 공간의 존재를 알려주려던 건 아닐 거 아냐.]

 

“호루스가 이것을 물어보랬어. 너는 ‘세트’를 알아?”

 

샤는 눈을 깜박이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어떤 의미에서 한 질문인진 모르겠지만, 대답에 따라 설명이 달라질 것은 자명했다. 잠시 고민해보았으나 이렇게 고민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세트를 알고 있다는 대답과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헛웃음 지었다.

 

[그 세트가 내가 아는 세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긴 알아. 내가 널 알고 있던 것처럼 말이야.]

 

샤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의아함을 숨기지 않고 손을 바라보고 있으니, 샤의 손 위로 불투명한 빛과 함께 광물이 나타났다. 그것은 피를 머금은 것처럼 새빨간 광택을 가지고 있었지만, 불길하다기보단 신비로운 느낌이 강했다.

 

“고대의 존재가 남기고 간 파편이야. 상서로운 개화가 일어나면, 그의 주인에게 전하라는 전언이 있다고 해.”

 

[설마 그게 나라는 뜻은 아니지?]

 

떨리는 동공을 숨기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샤는 왜 아니겠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하지만 그런 엄청난 광물이라면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게 주어지는 게 맞지 않나? 나는 이 세계에 뜬금없이 끼어든 작가이고, 실제 신화는 저들에 의해 쓰이고 있을 텐데. 이런 전언은 샤에게 더 어울렸다. 그는 원작의 주인공이었으니까, 당연히 그에게 돌아가는 게 마땅한 일이다.

 

“너는 고대부터 존재한 연꽃에서 태어났어. 고대의 파편은 네 것이 맞아. 호루스도, 나도 그렇게 판단했어.”

 

[솔직히 말하면, 너희의 판단이 틀렸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 정말로. 나는 이런 걸 갖고 있을 자격이 없는걸.]

 

내 말을 들은 샤는 표정을 굳혔다. 나에겐 언제나 온건한 눈빛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호루스처럼 매서운 시선이었다. 샤는 한 걸음 다가오더니 내 손에 광물을 쥐여주었다. 선택권이 없다는 듯한 행동에 당황한 나머지, 뭐라 말도 못 하고 돌려주지도 못한 채 눈만 굴려댔다. 손에 쥐어진 광물과 조금 무서워진 샤를 번갈아 보며 멈춰버린 생각을 애써 가동했다.

 

[샤, 샤. 이게 내 것이 맞다고 치자. 나는 이걸로 뭘 해야 해? 나는 너처럼 신으로서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식이 뛰어난 것도 아니야. 그냥 평범한 인간, 아니, 신이라고.]

 

“너는 무엇도 할 필요가 없어. 네가 원하는 대로 선택해. 우리는 너를 지지할 뿐이야.”

 

[아니, 하지만 최소한의 정보는 줘야 하지 않을까?]

 

샤는 고민하는 눈치였다. 호루스가 뭐라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샤에게서 정보를 뜯어내야 한다. …뜯어낸다고 하니 이상한 것 같지만, 아무튼. 이 상태로는 죽도 밥도 안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네가 질문한 것에 답할 수 있어. 내가 먼저 말할 수는 없어.”

 

[그거면 충분해.]

 

설명해준다고 했으면서 이리도 불친절한 상황이라니. 샤는 호루스가 시킨 대로 하는 것일 테니, 전부 호루스 탓이다. 대화가 끝나고, 신들의 농성도 끝나고 나면 호루스에게 따져야 할 것 같다.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샤에게는 죄가 없다는 문장을 계속 되뇌며 질문할 것들을 찾아보았다.

 

[일단은…. 이 파편을 왜 지금 준 거야? 그러니까, 내가 연꽃에서 나온 지는 꽤 오래됐잖아. 그동안 무언가를 판단하려 했다면 이해가 되지만…. 나는 아무것도 안 하며 살았는데, 판단할 거리가 있었어?]

 

“너는 다른 이들을 해하지 않았어. 호루스의 지팡이를 악용하지도 않았고.”

 

[그건 단순히 능력이 없기 때문 아닐까?]

 

“아니야. 너에게는 분명 능력이 있어.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야.”

 

이건 의외의 말이었다. 차원 이동한 뒤 몸의 구성이 조금 달라지긴 했어도,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것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마력이 느껴진다든지 하는 것들도 없어서 마법 같은 능력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말이었다. 나도 모르는 능력을 저들이 파악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나한테 능력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어? 나는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금방 대답하던 전과는 달리 망설이는 낯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나에게 숨기고 싶은 것일까. 어느 쪽이든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샤와 호루스가 날 버리고 어울리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대면한 상태에서도 정보를 주지 않는다면 꽤나 실망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실망한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시륜. 그 파편을 흡수해 봐.”

 

[흡수라니? 이걸 삼키라는 뜻이야?]

 

“바로 흡수할 수 없다면, 응.”

 

실망감의 지배를 받기 직전, 너무 당황스러운 말을 들어버렸다. 이 광물을 흡수하라니? 흔한 판타지물처럼 손 안에서 녹아 저절로 흡수될 리도 없고, 음식처럼 곧장 삼키기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조개를 먹다가 모래알 같은 것이 씹힐 때도 기분이 나빠지는데, 아예 돌처럼 생긴 것을 먹어야 한다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샤는 정말 꿋꿋했다. 내가 흡수하기 전까지는 같은 표정과 자세로 있을 기세였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대로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체념했다. 그래, 파편을 입에 넣었다는 뜻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파편은 조금 큰 알사탕 크기여서 한입에 넣을 수 있었다. 결국 저질러버렸다는 충격에 굳어있던 찰나, 파편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액체로 변했다. 끈적거리지 않고, 물처럼 매끈하게 넘어가는 재질이었다. 맛은… 별로 표현하고 싶지 않은 맛이었다. 다시는 먹고 싶지 않았다.

 

파편을 삼킨 뒤에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갑자기 각성한 것처럼 능력이 생긴다거나 몸속에서 기이한 기운이 느껴지는 일은 없었다. 혹시 소화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음식을 삼켰을 때, 그것이 완전히 소화되기까지는 평균 32시간 정도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건 액체니까 다른 물처럼 흡수되려나. 원래는 광물이었으니 다르게 취급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광물의 소화 시간을 누가 알겠는가. 그런 건 생물 시간에 배운 적 없고, 들어본 적조차 없다.

 

이상한 생각들을 이어나가며 샤의 눈치를 살폈다. 무언가 실망한 표정일 줄 알았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한 낯이었다. 아니, 잘 모르겠다. 항상 무표정해도 샤의 감정을 읽어내기는 쉬운 일이었는데, 지금은 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근육의 미세한 떨림조차 없이 완벽한 무표정이었다. 조금 당황스러워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두었다. 와, 나무가 너무 멋지다. 열매도 맛있겠다. …진지한 생각은 던져두고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샤가 먼저 이야기를 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올라가자.”

 

[응? 어디로?]

 

“밖으로.”

 

무언가 진지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돌아온 대답은 무척 뜬금없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생각이 멈춰, 나 또한 엉뚱한 질문을 내뱉고 말았다. 당연히 밖으로 나가는 것인데 말이다. 샤의 침묵이나 방금 삼킨 파편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요구하고 싶었지만, 나름의 뜻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몸을 움직였다.

 

지하에서 벗어나 다시 익숙한 신전으로 돌아왔다. 계단을 드러내놓고 있던 석상은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 자리를 지켰다. 신전 바깥은 여전히 소란스러웠지만, 나와 샤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하에선 설명하지 못한, 혹은 하지 않은 설명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샤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 표정이었고, 그의 말을 듣는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저절로 귀를 의심하게 되는 내용만 가득했다.

 

첫째, 호루스는 나와 세트를 붙여놓고자 한다. 그동안은 샤와 지낼 수 있도록 했지만, 샤의 위치가 공고해짐에 따라 내 위치가 더 불안정해지는 것 같아 내린 결정이라고 한다. 다른 신들은 고대부터 내려온 샤—라는 이름이 붙은 것에 희망을 건 것 같다. 붉은 눈을 가졌지만, 그렇기에 악으로부터 적색을 뺏어올 수 있는 존재라며 샤를 추앙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세 전환 내지는 합리화 같지만, 샤에게는 잘된 일이므로 그저 수긍했다. 그 외에도 샤의 능력이 점차 인정받는 것 같았다. 샤는 푸른 연꽃에서 태어나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성장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일반적인 신을 압도할 정도의 능력을 보이고 있다. 다른 신들이 희망을 걸기에 충분하다는 뜻이다.

 

반면, 나는 아무런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은 괴상한 존재이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과 소통할 수도 없고, 신이 맞는지도 불확실한 존재. 어느 방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지도 않으니, 그들이 인정하기에는 한참 부족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런 놈들의 인정을 받고 싶지는 않지만…. 나 때문에 샤와 호루스의 위치가 흔들린다면, 그건 문제가 되니까. 호루스는 나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아마 이런 계산도 같이했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그가 나를 보호하기는 힘들어질 것이고, 신들의 아우성은 더 커질 것이다. 나를 보호해줄 존재가 필요한데, 때마침 신들이 함부로 덤빌 수 없는 상대가 돌아온다? 세트의 성격이 어떤지, 그들의 관계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호루스는 도박으로나마 시도해볼 만하다고 여겼을 터이다. 세트 곁에 머무른다면 그 어떤 신도 나를 함부로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세트가 수락하기만 한다면 꽤나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그와 내가 잘 지낼 수 있을지는 차치하고 말이다.

 

둘째, 세트는 호루스의 제안을 수락했다. 몇 번은 거절당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호루스도 제 귀를 의심하며 재차 물었다고 한다.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수락하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생각해보라는 발언도 했다던데…. 뭐, 수상쩍긴 하지만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세트에게 가면 호루스가 짊어질 부담도 줄어들고, 나도 신들에게 욕을 덜 먹을 수 있으니 좋지 않나. 물론 샤와 만나는 시간이 더 줄어든다는 것은 슬프지만, 그를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외로움은… 잘 모르겠다. 지금처럼 혼자 있는 시간은 줄어들 테지만, 정들고 익숙해진 애들과는 달리 생판 초면인 세트와 함께하는 것은 어색할지도 모른다. 내가 설정한 바와 같을지 다를지도 아직 모르고, 같다 한다면 상당히 활동적일 테니 나와는 상극일 게 분명하다. 외로움을 해소하는 대신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설정과 다르다면… 도저히 예측할 수 없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셋째, 세트는 당분간 신의 영역에서 지낼 것이다. 그는 항상 인간계를 떠돌며 지내왔지만, 나를 맡게 되며 생활 반경을 바꾸기로 한 것 같다. 내가 그에게 익숙해질 때까지는 신의 영역에서 지내고, 익숙해진 뒤에는 인간계를 오고 가며 여러 가지를 알려준다고 한다.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상당히 배려심이 깊은 것 같다. 호루스는 세트에게 꿍꿍이가 없는지 의심하는 것 같지만, 샤와 나는 그의 배려를 감사히 여기기로 했다. 호루스보다는 세심한 배려이지 않은가. 무턱대고 지팡이 하나만 쥐여준 뒤, 샤를 챙기느라 나를 방치한 호루스보다는 훨씬 나은 행동이었다. 이 말을 하니 샤도 동감하는 듯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넷째, 샤는 호루스의 정식 후계자로서 공표될 예정이다. 이미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조선 시대의 세자 책봉식처럼 무언가 의식을 지내야 하는 것 같았다. 정확히 어떤 의식인지는 모르겠다. 무언가 전문용어가 쓱쓱 지나간 것 같은데…. 이집트학을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을 대신 불러오고 싶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설명이었다. 어쨌든 그 의식은 몇 달 뒤, 샤가 태어난 지 1년이 되는 날에 치를 예정이라고 한다. 그날만큼은 모든 신이 모여 의식에 참여해야 한다고 하니, 얼마나 큰 규모인지 알 것 같다. 이번에 세트가 돌아온 이유도 이 의식을 위함이다. 후계자 공표 의식을 본 적 있는 신은 호루스와 세트, 그 외의 몇몇 주요 신과 엑스트라 신인데, 세부 과정을 온전히 아는 건 호루스와 세트뿐이라고 한다. 그마저도 호루스는 후계자로서 참석했던 것이라 진행에 부족함을 느꼈고, 세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런 내용을 듣고 보니, 둘의 사이는 생각보다 좋은 것 같다. 다른 신들은 앙숙이니 뭐니 떠들어댔지만 말이다.

 

기나긴 설명이 끝난 뒤, 샤와 나는 신전 밖으로 나왔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인지, 농성 부리던 신들도 어디론가 사라진 채였다. 호루스는 굳은 눈매를 풀며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숨 막힐 듯한 심해의 눈동자는 윤슬처럼 맑아졌다.

 

“설명은 잘 들었나?”

 

[들을 건 다 들었을걸…? 그치?]

 

“응. 다 했어.”

 

[아, 파편 정체는 못 들었다.]

 

“그건 호루스도 모른댔어.”

 

샤와 나의 대화를 듣던 호루스는 눈썹을 잠시 까딱이고는 팔짱을 낀 채 신전 기둥에 기대었다. 처음 보는 불량한 모습이었다.

 

“파편은 오래전부터 보관되던 것이다. 이전의 태양, 라는 나에게 그 무엇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 그래서 불만이 많았나 보다. 항상 곧고 반듯하게 서 있던 호루스가 저런 자세를 취할 정도라면, 라는 인수인계를 제대로 하지 않고 떠난 것 같다. 인수인계를 못 받은 상태여서 다른 신들이 그를 쉽게 여기는 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상당히 오랫동안 잘 이끈 것을 보면 호루스의 능력은 어마어마할 것이 분명한데. 오늘도 엑스트라 신들의 지능에 한탄하게 된다.

 

[그 파편의 출처도 모르는 거야? 뭐, 누가 가져왔다든지, 어디에서 떨어졌다든지. 자연적으로 발생했으려나?]

 

샤는 내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고, 호루스는 망설임 없이 한 존재의 이름을 말했다.

 

“세트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라와 같은 시기부터 존재했으니, 고대의 것이라면 나보다 잘 알겠지.”

 

[그럼 왜 안 물어봤어?]

 

“물어보았다. 허나 내 질문에 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치 라에게서 언질이라도 들은 것처럼…. 그는 말을 흐리며 먼 옛날을 회상하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추억인 걸까, 아니면 잊고 싶은 기억인 걸까. 나는 라가 살던 시대에 대해 설정한 바가 없으므로, 그에 얽힌 과거사도 알지 못했다. 하여, 그저 침묵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호루스는 깊은 과거에 잠긴 듯 보였기에, 그를 방해하지 않고자 조용히 떠났다. 샤도 나와 함께 호루스에게서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