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망록

3화

10,514자

신화시대의 하루는 무척 지루했다. 아는 사람도 하나 없고, 인터넷도 없다. 책을 읽고 싶어도, 이곳의 서적은 알 수 없는 언어로 적혀 있어 읽을 수 없다. 심지어 신들과는 언어가 다르니, 누군가와 대화할 수도 없다. 차라리 온종일 자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호루스가 준 지팡이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구경하기도 하고, 밤하늘임에도 불구하고 태양이 지지 않아 계속 환한 상태인 신의 영역을 둘러보기도 했다. 다른 신들과의 대화를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에 금방 포기해버렸다. 내가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을 모르는지, 그들은 나를 앞에 두고서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불완전한 성장이라니, 불길하지 않나.”

 

“우리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게다가 태초부터 존재했다는 검은 연꽃의 주인이라니요.”

 

“푸른 태양의 결정을 믿어도 되는 건가? 그가 아직 어린 탓에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게 아닌지 의심되는군.”

 

“붉은색은 없어 다행이지만, 이 또한 모를 일 아닙니까. 이번엔 악이 흑색을 소유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과한 걱정일세. 대다수가 흑색인 마당에, 저깟 존재가 색을 앗아갈 수 있겠는가.”

 

정말이지, 이게 신이 맞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호루스는 약간의 신성함 같은 것이라도 느껴졌는데, 저들은 별다른 능력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무능하고 멍청한 족속 같았다.

 

내가 설정한 바로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신들도 자애로움을 지닌 채 인간을 보살피는 게 정상이었다. 전쟁 신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온건한 축에 속했고, 인간 특유의 감정은 모두 배제된 채 공정한 판단만을 내리는 것이 특징이었다.

 

허나 저들을 봐라. 싫어하는 자에 대해 뒤에서 수군거리며 비웃는 인간과 다를 게 없지 않나. 알 수 없는 실망감이 들었다. 내가 만들어낸 세상이기에 품고 있던 애정도 저들에게는 주고 싶지 않았다. 저들에게는 나의 애정이 사치였다. 그러니까, 나는 저들을 ‘내가 만들지 않은 엑스트라’로 취급하기로 했다.

 

-

 

내가 태어난 지, 아니, 태어났다 하니 말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 내가 연꽃에서 나온 지 나흘째 되는 날이다. 내가 나온 연꽃처럼 특이한 색을 가진 연꽃이 떠내려왔다. 짙푸른 바다를 닮은 색이었고, 크기는 다소 작은 편이었다. 호루스의 말에 따르면 아직 개화할 때가 안 된 연꽃이었다. 하지만 그 연꽃은 곧 개화하려는 듯 꽃봉오리를 모았고, 색도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나에 이어 또다시 특이한 신이 태어나려 하니, 호루스도 꽤 당황한 낯이었다.

 

“이 연꽃은 얼마 전에 나타난 것이다. 몇 년에 걸쳐 성장한 뒤 떠내려왔어야 했는데, 벌써 떠내려오다니.”

 

그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내 곁으로 붙어섰다. 나는 그제야 다른 신들의 따가운 시선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들은 내가 원흉이라는 듯 쳐다보고 있었는데, 아무리 엑스트라로 취급하려 해도 인원이 너무 많아 부담스러웠다. 조금 무섭기도 했다. 호루스는 그들의 시선을 가린 뒤, 나에게만 조용히 속삭였다.

 

“너의 탓이 아니다. 이 또한 운명일 터.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존재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나. 누군가를 탓해야 한다면, 이는 모두 나의 잘못이다. 허니 네 것이 아닌 일로 자책하지 마라.”

 

[…감사합니다.]

 

진심이었다. 죄책감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나 때문에 무언가가 틀어졌을까 두려웠다. 며칠간 수도 없이 들어온 나에 대한 비난도 한몫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행동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 때문에 호루스의 평판이 흔들렸지 않았나. 그런데도 나를 대놓고 감싸주려 하니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나를 감싸는 모습을 보이자 신들의 시선은 이리저리 흩어졌다. 헛기침하는 신도 있었고, 표정을 험하게 구기는 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호루스에게 맞서려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그는 신들을 대표하는 존재이니, 불만이 쌓일지언정 그를 막아설 수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호루스의 지팡이를 힘주어 껴안았다. 호루스의 뒤에 숨어있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슬쩍 앞으로 나와 푸른 연꽃을 바라보았다. 연꽃은 내 시선에 반응하듯 열리기 시작했다. 겹겹이 감싸진 꽃잎이 하나둘 펼쳐지고,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내 남은 인생을 바치게 될지도 모르는 붉은 눈동자와 마주했다.

 

몇몇 신들은 내가 태어났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어쩌면 더 심한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붉은 눈동자를 확인하자마자 까무러칠 듯 놀라며 물러섰기 때문이다. 호루스만이 침착한 모습으로, 그 아이를 자신의 신전으로 안내했다. 나는 그를 따라가며 옆에 선 아이를 흘깃거렸다. 아이는 너무나도 빛나서, 내가 상상했던 모든 것의 이상이었다. 하지만 곧 나의 시선이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까 걱정되어, 호루스의 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걸어갔다.

 

고작해야 며칠일 뿐인데, 그동안 머물렀던 장소여서 그런지 호루스의 신전은 꽤나 익숙했다. 얼마 전 내가 앉았던 그 바위에 아이가 폴짝 뛰어 앉는 걸 보고,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아이는 당황하지도 않고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안녕, 나의 까만 빛.]

 

“응, 안녕.”

 

나는 놀라움을 숨길 수 없었다. 아이는 내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행동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호루스도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너는 이 존재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나?”

 

“응, 아마도. 알 수 있어.”

 

“그런가. 네 이름은 무엇이지?”

 

아이는 곤란해 보였다. 여전히 무표정한 낯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눈썹이 내려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호루스가 입을 열기 전, 서둘러 질문했다.

 

[혹시 너는 네 이름을 모르는 거야? 괜찮아. 곤란하다면 나에게만 알려줘. 다른 사람들에겐 말하지 않을게.]

 

최대한 친절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표정이 풀렸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머리를 굴리며 아이의 이름을 대신할 단어를 찾았다. ‘디레’라는 명칭은 나중에야 붙는 것이므로, 신화시대의 아이에게는 다른 이름이 적합했다.

 

[빛과 희망. 저들의 언어로는 알 수 없지만, 너는 빛과 희망이야. 저 파란 머리에게는 그렇게 전하면 돼. 나는 빛과 희망이라고,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바로 그 이름이라고.]

 

“빛과 희망. 나는 오래전부터 전해졌던 그 이름을 갖고 있어.”

 

호루스는 멈칫하며 재차 확인했다. 너의 이름이 ‘샤—’가 맞냐고.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칭찬해달라는 듯한 시선에, 나는 웃으며 아이의 팔을 토닥였다. 아이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샤—이라니. 시륜, 너는 알고 있었군.”

 

그는 어쩐지 허탈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저 시선을 피하며 아이의 손을 만지작거렸고, 아이는 내 행동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샤—와 시륜. 둘은 나와 함께한다. 다른 이들에게 맡길 순 없겠어.”

 

디레, 아니, ‘샤’와 함께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샤와 대화할 수 있다는 것도, 며칠간의 외로움을 없애버리기엔 충분하고도 남는 행복이었다. 호루스의 지팡이가 아닌 호루스 본인이 우리를 지킨다는 것도 행운처럼 느껴졌다. 돌아다닐 때마다 수군거리는 다른 신들보다는 호루스의 곁에 있는 것이 훨씬 편했고, 심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내 표정을 본 샤는 비슷한 표정으로 웃으려 했고, 이를 목격한 호루스도 소리 내 웃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웃은 첫 번째 순간이었다.

 

-

 

샤와 함께 지내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워낙 놀거리가 없는 시대인지라 걱정했는데, 샤와 함께 있으면 시간도 순식간에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캐릭터와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20년이 조금 넘는 인생에서 느껴보지 못한 쾌감을 선사했다. 인터넷이 없는 세상을 어떻게든 잘 버텨낼 정도로 강하고 긍정적인 감각이었다.

 

샤와 나는 합심하여 호루스를 놀리기도 했다. 말투는 차갑지만 의외로 어린아이들에게 약한 그는, 샤와 나의 장난에도 화내지 않으며 그대로 받아주었다. 다른 신들은 말세라며 혀를 차곤 했지만, 우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놀곤 했다.

 

[호루스, 호루스! 널 닮은 모래 새를 만들어봤어!]

 

“이건 뭐지?”

 

“호루스래.”

 

“…이게 나란 말인가?”

 

[네에, 호루스입니다~]

 

나는 어린 시절의 장난기를 끌어모은 것처럼 키득거렸고, 항상 무표정인 샤도 내 행동에는 함께 웃어주었다. 아마 감정을 학습하는 로봇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호루스는 샤의 감정이 한정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애당초 내가 만든 존재이니 나를 닮아가는 건 당연하다며 합리화하기로 했다.

 

때때로 샤는 호루스와 함께 호수를 거닐었다. 그들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의 사고방식을 지닌 채 대화했고, 몇 번 이해해보려 시도했지만 금방 포기하고 말았다. 그들의 대화는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빙빙 돌 정도였다. 결국 그들의 산책에 동행하지 않게 되었고, 그들이 산책할 동안 신의 영역을 돌아다니며 이집트풍의 배경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이 세계는 내가 창작한 글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모든 소설이 그렇듯 서술자가 알 수 없는 부분도 많았다. 애당초 내 글은 디레에게만 초점을 두었고, 주요 인물도 디레 주변의 몇몇에 불과했으니 더욱 그러했다. 정말 방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뛰어난 능력을 갖춘 자들이 아니라면 내가 그들에 대해 알 방도는 없었다. 호루스를 알아보지 못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나는 조연과 엑스트라들에게 자세한 설정을 부여하지 않았고, 그들의 외관도 설정한 적이 없다. 즉, 그들은 내가 만든 적 없이 알아서 태어난 존재들이다.

 

처음에는 그들에게도 약간의 애정이 있었다. 어쨌든 내가 만든 세상의 인물들이니, 이 세계에 애정을 품은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 기대와는 다른 모습만 보여주었고, 심지어는 내가 설정했던 것과 반대되는 행동도 자주 보였다. 애정을 품을 이유가 하등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나마 호루스만이 예외일까. 그는 내가 만들었다기엔 모호한 비중의 인물이었지만, 내가 상상한 것과 거의 동일한 모습이었다. 신으로서 중심을 지키며, 어쩌면 수호자처럼 자잘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자.

 

사실 그런 것보다도 이질적인 나와 샤를 챙겨준다는 것에 점수를 준 것 같다. 글 속에서는 대체 어떻게 하여 귀염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곳의 샤는 많은 신에게 배척받는 중이다. 붉은 눈동자라며 꺼림칙하게 여기고, 즐겁게 이야기하던 신들도 샤가 지나갈 때마다 입을 다문다. 샤는 아랑곳하지 않지만, 그 모습을 보는 나로선 안타까움이 들 뿐이다. 원래라면 모두가 그를 예뻐하며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주었을 텐데. 호루스는 자책하지 말라 했지만, 묘하게 계속 내 탓인 것 같아 씁쓸해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나는 많은 부분에서 호루스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의 곁에 머물긴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그의 지팡이도 항상 들고 다닌다. 그는 신들의 배척이 생각보다 큰 것을 보며 걱정하는 것 같다. 자신의 보호 아래에 있을지라도 말을 듣지 않는 신은 한둘 있기 마련이니,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나와 샤가 다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는 나에게 지팡이를 계속 가지고 다니라 말함과 동시에, 샤에게도 성물 중 하나를 빌려주었다. 샤에게 준 것은 황금색 서클릿이었다. 호루스가 정확한 명칭을 알려주긴 했지만, 나에겐 서클릿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모양새였다.

 

서클릿을 착용한 샤는 무척 반짝였다. 원래도 반짝거리긴 했지만, 이제는 햇빛을 직접 보는 것처럼 눈부셨다. 샤는 그를 볼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는 날 보며 의아해했다. 혹시 자신이 싫어진 것인지 고민하는 것처럼 불안해하기에, 얼른 호들갑 떨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샤, 너무 눈부셔! 저기 떠 있는 태양보다도 눈 부셔서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니까! 우리 샤는 왜 이렇게 반짝거리는 거야. 안 그래도 귀엽고 깜찍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빛나잖아! 어쩜 좋아. 널 볼 때마다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다, 내가.]

 

샤는 약간의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긴장해서 뻣뻣하게 굳어있던 어깨도 안심한 듯 내려갔고, 금방이라도 서클릿을 벗을 것처럼 올라간 손도 언제 그랬냐는 듯 움직여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그 과정마저도 귀여웠다. 이런 지루한 시대에서 유일하게 날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분명 샤일 것이다.

 

서클릿을 착용한 샤와 지팡이를 든 나. 잠깐, 저런 성물이 있었는데 왜 나한텐 이렇게 무겁고 챙기기 버거운 지팡이를 준 거지? 호루스에게 주었던 점수 중 일부를 깎아야 할 것 같다. 역시 그에게는 배려심이 부족하다. 잘 챙겨주긴 하는데 묘하게 세심함이 부족하다고 해야 할까.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이 몸뚱어리는 별다른 음식을 요구하진 않지만, 20년을 인간으로서 살아온 나는 허기짐을 느꼈다. 배가 고프진 않지만, 군것질을 하고 싶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호루스에게 이를 말하니, 별 해괴한 것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열매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결과적으론 열매를 잘 가져다주었고 그 열매도 맛있었지만, 그때 그의 표정은 꽤나 상처였다. 어차피 줄 것이라면 표정도 관리하면 안 됐던 걸까. 다른 신들 앞에선 참으로 우아하고 고아한 모습으로 있더니, 내 앞에선 정말 풍부한 감정을 드러낸다. 좋다면 좋은 거지만, 그 감정들이 죄다 경악에 가까워서 아니꼽다. 호루스와 너무 친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호루스가 주었던 열매는 사과와 자두를 섞은 것처럼 생겼는데, 맛은 복숭아에 가까웠던 것 같다. 이름은 카… 뭐였더라. 생명의 원천으로 불리는 열매라고 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집트에서는 ‘카’가 곧 영혼이라고 믿기 때문에 이 열매에도 유사한 이름이 붙은 것 같다. 신의 영역에 흔히 분포하는 열매이고, 신들은 자신의 신도 중 가장 뛰어난 이에게 열매를 선물하여 자격을 부여한다고 한다. 신이 먹는 용도로는 잘 안 쓰이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열매를 매일 먹고 있으니, 다른 신들은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설명을 듣고 나니 나름 수긍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호루스의 표정은 아니꼬웠다. 친절한 설명과 그렇지 못한 표정이라니. 역시 너무 친해져 버렸다.

 

샤에게 투덜거리니, 샤는 온화하게 웃으며 나를 달래주었다. …잠시 이질감이 들었다. 묘하게 미래의 디레와 겹쳐 보여, 얼른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날려 보냈다.

 

[있잖아, 샤. 너도 이 카… 열매 먹어볼래?]

 

샤는 슬쩍 고개를 기울이더니 먹여달라는 듯 입을 벌렸다. 아, 너무 귀여워. 어린 샤는 너무 깜찍했다. 나는 열매를 샤의 입가로 가져갔고, 샤는 그 작은 입으로 열매를 베어 문 뒤 열심히 오물거렸다.

 

“달고 셔.”

 

샤의 미간이 살짝 파인 걸 보며 나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웃어도 뭐라 하진 않겠지만, 왠지 뾰로통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어린 샤라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샤는 열매를 몇 입 더 베어 물었다. 시다고는 하지만 그럭저럭 입에 맞는 것 같았다.

 

[이 장면을 보면 다른 신들은 또 쓴소리하겠지?]

 

“응, 그렇겠지.”

 

[신들은 낭만을 몰라~]

 

“신들은 낭만을 몰라?”

 

내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걸 보니 참고 있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을 외워두었다가 따라 하는 어린아이들이 떠올랐다.

 

[아냐, 그냥 농담. 별 뜻은 없었어.]

 

샤는 생각을 정리하듯 시선을 내렸다. 회색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며 시간이 지나는 것을 알려주었다.

 

“너는 언제나 알 수 없는 말을 해.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아.”

 

[으음, 그건 어쩔 수 없지. 나는 신이 아닌걸.]

 

“하지만 너도 연꽃에서 태어났어. 우리와 같아.”

 

[글쎄….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그렇긴 하네.]

 

샤의 말에 솔직하게 답하고 싶었지만, 생각난 문장들은 그 무엇도 내뱉을 수 없었다. 내가 사실은 다른 세계에서 태어난 인간인데, 너희의 이야기를 글로 썼더니 이 세계로 이동해버렸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의 나도 정상적인 모습은 아닌 것 같지만, 이 말을 흘렸다가는 정말 미친 취급을 받을 것이다. 샤라면 이해하려 노력할지도 모르겠지만…. 샤에게도 그다지 말하고 싶진 않았다. 그에게 주어진 미래를 생각하면 더더욱 숨기고 싶을 뿐이었다.

 

[샤. 내가 많은 걸 숨기고 있지만, 그래도 널 많이 아낀다는 것만 알아줘.]

 

언젠간 네가 절망할 날이 다가오더라도, 그것을 내가 설정했다는 걸 알게 되더라도. 날 너무 원망하진 말아줘. 문득 든 생각에, 양심도 없는 거냐며 스스로를 비난하며 웃었다. 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느릿한 움직임으로 눈꺼풀을 닫았다가 열었을 뿐이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내 속내를 짐작하려는 듯 깊은 곳까지 불타올랐다.

 

-

 

[샤, 너 왠지 키가 큰 것 같아. 원래는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손을 일자로 만든 뒤 명치에 붙였다. 얼마 전만 해도 명치에나 겨우 올 법한 키였는데, 지금은 나의 가슴께까지 오는 것 같았다. 몇 달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만한 성장이라니. 역시 신은 다른 걸까 싶어 호루스에게 물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또 한쪽 눈썹을 까닥이며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나는 오답을 말한 것 같다.

 

[아냐, 말하지 말아봐. 내가 맞혀볼게. 샤, 이 말 좀 전해줄래?]

 

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장을 그대로 읊었고, 호루스는 설명하려던 것을 멈춘 채 기다려주었다. 그리 오래 기다려줄 것 같지는 않아 빠르게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먼저, 샤는 예상보다 빠르게 태어난 편이다. 몇 년 정도 일찍 태어났고, 아마 여러 면에서 성장하지 못한 상태였을 것이다. 정상적으로 태어난 신들은 자질을 충분히 갖춘 상태에서 성장을 시작할 것이고, 연꽃일 때와 마찬가지로 몇 년에 걸쳐 성장할 것이다. 어쩌면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반면 샤는 부족한 면을 채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므로, 전체적으로 보면 다른 신들보다 성장이 느려야 한다. 하지만 다른 신들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는 것 같다. 어쩌면 부족한 면을 채우지 않고 바로 성장을 시작하는 건 아닐까? 10에서 11이 되는 것보단 1에서 2가 되는 게 쉬운 것처럼, 덜 여문 채 태어난 샤가 더 빨리 성장하는 건 아닐까?

 

이러한 생각을 정리하여 내뱉으니, 묵묵히 듣고 있던 호루스는 침음을 흘렸다. 정답도 오답도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눈매를 접으며 나를 바라보다가 샤를 내보냈다. 샤에게는 말할 수 없는 화제인 걸까. 샤는 계속 듣고 싶어 하는 낯이었지만, 호루스의 말에 호기심을 접으며 신전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호루스는 입을 열지 않은 채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관찰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나에게서 무언가를 눈치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숨겨야 하는 것들을 말한 기억은 없지만, 그의 눈치는 상상 이상으로 빠르므로 무언가를 들켰을지도 모르겠다. 미약한 불안을 품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나도 너와 같이 예측했다. 여물지 못한 상태에서 개화한 신은 모든 면에서 미성숙하므로, 초반에는 다른 이들보다 빠른 성장을 보이겠지. 허나 갈수록 부족함을 느낄 것이다. 성장이 느려지고, 종래에는 도달해야 할 지점에 닿기 전에 멈출 게 분명하다.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성장. 저 아이는 그리될 운명인 거다.”

 

씁쓸한 말이었지만 조금 안심하고 말았다. 그는 아직 나에 대해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서, 아직 그들을 편히 대할 수 있어서. 최대한 정체를 숨기고픈 나의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샤의 불완전성에 대해 온전히 슬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불완전한 신’은 이미 알고 있던 것 아닌가. 샤의, 디레의 서사를 관통하는 것이 바로 불완전이었으므로. 그저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었다.

 

호루스는 나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지금의 내가 드러낸 감정은 확실히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 커다란 덩치와 손아귀에 맞지 않게 여린 힘이었다.

 

“시륜. 이번에도 너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겠지. 샤—의 탄생을 예측했듯, 나로선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보고 있을 거다. 네가 숨기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터이니, 그 정보를 알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다만, 그것에 얽매이진 마라. 너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라. 그 정보가 옳은 것일지라도, 네 주변 누군가의 운명을 보여주더라도. 그 모든 것을 당연하다 여기지 마라.”

 

그리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나에 대해 파헤치지 않겠다는 분위기였으므로, 그런 상황에서 모든 걸 숨긴 채 스스로 판단하는 것쯤은 쉬운 일이었다. 이미 내가 설정했던 바와 이곳의 현실이 다르다는 것은 깨닫고 있었지 않나. 무작정 원작에 의존하며 현실을 외면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더 깊은 뜻이 숨어있을 것 같았다. 제대로 곱씹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만 같았다. 나는 호루스와 닮은 표정을 지었다. 눈을 내리감은 채 입가를 딱딱하게 굳히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는 내가 모든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직감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꿰뚫어 보는 듯한 푸른 시선을 마주하고 말문을 트려 입술을 달싹였지만, 나오는 것은 소리 없는 한숨뿐이었다.

 

“내 말을 충분히 이해한 것 같으니 되었다. 네가 가진 정보의 가치는 네가 더 잘 알겠지. 이용할 수 없다면 숨겨라. 숨길 수 없다면 잊어라. 그것이 너를 좌지우지하게 두지 마라.”

 

너는 우리와 다르니, 우리와 같은 운명을 따를 필요는 없다. 그는 말을 덧붙였다. 적색이 가진 운명을 말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마치 그들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는 것처럼,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처럼. 줄에 매인 동물처럼 체념한 낯이었다. 그에게 무어라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