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눈을 떴을 때의 세상은 온통 검었다. 그나마 물이라도 차 있던 어둠 속과는 달랐다. 진정한 암흑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일반적으로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검은색과는 다른, 그 어떤 빛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짙은 어둠이었다. 내 모습을 보는 것은 사치이며, 공기의 떨림이나 미약한 온기마저 느낄 수 없게 만드는 기묘한 곳. 눈의 바다가 창조와 소멸의 공간이었다면, 이곳은 그 너머의 무언가였다. 인지할 수 없는, 생각을 이어가기조차 버거운 어떤 곳이었다.
아무도 없는 것일까? 디아도 없는 걸까? 눈의 바다에서 디아가 나를 꺼내주었듯, 이 부담감 속에서 구해줄 누군가는 없는 걸까? 무서웠다. 이곳은 너무나도 이상했다.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영역 같았고, 영영 떠날 수 없게 붙잡아 가둬버리는 거대한 힘의 흐름 같았다. 나는 무서웠다. 디아는 이 상황을 예측했을까? 이 무서운 공간에 나를 던져둔 이유는 무엇이지?
한참을 불안에 떨었다. 아니, 내 몸이 움직인다는 감각은 없었으니 그저 심리적인 반응일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맡아지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다. 모든 감각이 통제되어 있다. 의식이 남아있는 건 행운일까 불운일까. 차라리 이럴 것이라면 나를 기절시켜주었으면 한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진 모르겠지만, 무언가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작은 상자에 갇혀있다가 큰 상자로 옮겨간 기분이었다. 내가 있는 공간이 급격히 거대해진 것 같았다. 인지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공간은 무한히 넓어지려 하고, 공간 내에서도 무언가 변화가 생기려 했다. 이를테면 작은 입자들이 생겨나 어디론가 흘러가고 서로 뭉치며 폭발하는 것 말이다. 그것들은 매우 거대했고 힘이 넘쳤다. 이제 이곳은 어둡지 않았다. 나는 시각을 되찾았다.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어두컴컴하던 공간은 화려한 빛을 뽐내는 것들로 가득해졌다. 그 광경을 홀린 듯 보다가 뒤늦게야 깨달았다. 이곳은 우주였구나, 하고. 어쩌면 나는 우주의 탄생 과정을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수십억 년의 세월을 버텨온 걸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둠밖에 없어서 시간 감각도 잊어버렸다지만, 수십억 년을 불과 하루 이틀로 느끼는 것은 심하지 않은가. 이게 꿈이 아니라면, 판타지적인 허용에 의해 우주와 나의 상대적인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 헛소리이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저 이 광경이 너무 멋져서 그렇다. 이런 것을 보기 위해 어둠 속에 처박혀 있어야 했던 거라면 나름 버틸 만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당연히 농담이다. 다시 어둠 속에 들어가라고 하면 욕할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은 풍경이고, 내 억울함은 해소되지 못했다.
설마 태양계가 생기고 지구가 생겨난 뒤 생명체가 탄생하여 진화하며 인류의 조상이 출현하고 현 인류가 나타나 신이라는 가상적인 존재를 상상하며 집단을 이루고 국가를 건설할 때까지 기다리는 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디아를 원망할 것이다. 아니지, 디아의 위에 있을 누군가를 찾아갈 것이다. 다 뒤엎어야 한다. 디레를 만나기 전에 내가 먼저 미칠 것 같은데 어쩌겠는가. 저 과정을 생략하지 않으면 악의 화신과 합심하여 세상을 없애버릴 것이라는 등 황폐한 생각을 이어가니,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 우주는 순식간에 변해갔다. …그럴 수 있었으면 진작 그랬어야지. 대체 왜 내가 온갖 악독한 상상을 하게 만든 걸까.
아무튼, 이제 내 눈앞엔 지구가 있다. 우리가 아는 지구는 아니고, 한참 전의, 그러니까 약 50억 년 전의 지구이다. …잠깐, 장난해? 빨리 넘겨달라고. 진짜 힘들어. 게임에도 스킵 버튼이 있는데 이곳에는 없나요? 누군지 모를 존재야, 어서 신화시대로 보내 달라고.
이번에도 내 욕설이 통했다. 아직 바다가 없어 붉은 천체에 불과하던 지구는 곧 푸르른 바다에 뒤덮였고, 곧 수많은 생명체가 육지에 진출했다. 틱타알릭이라는 괴상하게 생긴 생물도 나왔고, 좀 더 지나니 거대한 식물과 공룡이 등장했다. 중간 과정이 심각하게 생략된 것 같지만, 나에겐 좋은 일이니 뭐라 하지 않았다. 운석이 떨어지고,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나고, 잿더미로 인해 햇빛이 들지 않고. 다들 아는 그 과정을 거쳐 공룡이 멸종한 뒤, 다수의 포유류가 번성하기 시작했다. …서술이 점점 과학책처럼 변해가는 것 같다면 착각일 것이다. 아무튼, 얼마 지나지 않아 인류의 조상처럼 생긴 생물들도 나타났다. 우주가 발전하고 지구가 변화하는 것에 비하면 정말 순간에 가까운 속도로, 그들은 인간이 되었다. 인간은 순식간에 자랐고, 많은 것을 상상해냈다. 그들의 상상은 대부분 현실이 되었다. 마침내 신이 탄생하던 순간이었다.
신들은 온갖 곳에서 탄생했다. 아직 나라라는 개념이 갖춰지지 않은 시대에서 신들의 활약은 그리 대단치 않았다. 그들은 인간에게 귀속되어 느린 속도로 자랐고, 인간이 동물을 사냥하고 농업혁명을 일궈내는 순간까지도 발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그저 인간의 믿음을 한데 모아 인간의 결집을 돕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관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디서 시작된 변화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지만, 내 감정과는 별개로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신들은 인간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고, 인간은 그들의 아래에서 더딘 발전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나는 인간들을 다스리던 붉은 것과 눈이 마주쳤다. 우주에서 보았던 그 어떤 붉은 별보다도 짙게 타오르는 존재. 그것은 눈을 가늘게 뜨며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것과 나의 시간은 달랐기에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사라졌고, 인간들은 혼란에 빠진 채 새로운 것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신화시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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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듯 지구의 이곳저곳을 관찰하던 나는 이상한 곳에 갇혀있는 상태이다. 검고 불투명하며 비단처럼 부드러운 촉감을 가진 것들이 내 주변을 가로막고 있다. 천장도 바닥도 막힌 상태이다. 앞서 나는 ‘작은 상자에 갇혀있는 것 같다’라는 비유를 사용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씨가 된 것 같다. 네모나진 않지만 어쨌든 내 몸보다 약간 큰 크기의 구형 구조물 안에 갇힌 상태이다. 왜 자꾸 나는 어딘가에 갇히는 것일까. 뭔지 모를 위대한 존재가 나를 가두는 걸 좋아하는 걸까? 정말 끔찍하다.
조금쯤 지루해져 하품이 나왔다. 또 얼마나 기다려야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잘하면 이것을 찢어 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상한 벽을 꽉 잡아 늘여보았는데, 찢어지기는커녕 주름조차 생기지 않은 채 길게 늘어났다. 고무줄도 이보다는 신축성이 안 좋을 것이다. 찢는 건 불가능하고,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그저 얌전히 기다려보았다. 꽉 막힌 벽은 슬며시 빛을 들여왔다. 구멍 하나 없이 막혀있는데 말이다. 어떻게 되어 먹은 기술인지 모르겠지만, 이 또한 판타지적인 허용이라고 생각하며 납득하려 했다. 조금 있으니 벽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꼭 약한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장이 열리기 시작했고, 눈 부신 햇살이 내 눈을 괴롭혔다. 그 때문에 상황 파악이 늦어졌고, 빛에 적응해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되었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 나는 그대로, 정말 예능보다도 시원하게 입수했다.
무척 억울했다. 어둠과 물을 얼마나 오가고 있는 걸까. 위대한 존재는 나를 물 먹일 작정인가. 허탈함에 눈을 찌푸리며 헤엄쳤다. 다행히 이곳 역시 숨을 쉴 수 있는 수중이었다. 천천히 헤엄치다가 무언가가 발목을 잡아 돌아보니, 검붉은 실타래가 발목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아까까진 없던 것 같은데? 뭐, 이게 중요한 건 아니니 우선은 실을 풀기 위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자마자 실이 손목을 휘감긴 했지만, 이것도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내가 만든 세계관에 차원 이동했다면 공포 요소는 없을 테니까, 이건 귀신의 소행 같은 게 아니다. 아닐 것이다. 그리 믿으며 실을 풀려 했으나 실은 오히려 계속해 얽혀왔고, 결국 손목에 붉은 실을 감은 채로 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입고 있던,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몸에 둘둘 감겨 있던 검은 천 쪼가리는 물에 젖어 축 늘어진 상태였다. 기분이 좋지 않아 물을 짜내고 있으니, 무언가 거대한 그림자가 햇빛을 가렸다. 대체 뭐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드니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 몰골을 훑더니, 미간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와라. 네 모습을 보니 될 것도 안 될 것 같군.”
만나자마자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칭찬은 아니었다. 기분이 더 나빠졌지만 거대한 몸집에 겁을 먹은 상태인지라,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그를 따라갔다. 어느 순간부터 붉은 실은 사라진 채였다.
그를 따라가는 동안 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주위를 스윽 훑으면 눈이 마주쳐 화들짝 놀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내가 이상하게 생겼나? 저들과 나는 인종이 다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곧 화려한 신전에 도착했다. 신전이 아닐 수도 있지만, 대충 신전처럼 생겼으니 신전일 것이다. 어차피 저게 신전이든 아니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주변의 풍경을 구경하며 속 편히 걸어갔다. 긴장하기에는 단기간에 너무 많은 것을 겪어서, 긴장할 기력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자, 여기 앉아라.”
그는 기묘하게 생긴 돌덩어리를 가리켰다. 설마 저게 의자인가? 내가 이집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는 해도, 저게 의자가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 것 같다. 이상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그를 올려다보니, 그는 내 얼굴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솔직히 부담스러웠지만, 그가 나의 얼굴을 구경하고 있으니 나도 구경하겠다는 마음으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날개뼈를 덮는 길이의 푸른 머리카락을 가졌고, 마찬가지로 바다를 닮은 짙푸른 눈동자를 가졌다. 눈매는 날카로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래, 사실 나는 외모를 묘사할 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그를 파랗고 검은 사람으로 정의했다. 불만이 있다면 이름을 알려주겠지.
“나는 푸른 태양의 매, 호루스이다. 네 이름은 무엇이지?”
아, 이런. 순간 속마음을 들킨 줄 알았다. 파랗고 검은 사람은 호루스였구나. …내가 아는 호루스? 이집트의 신? 그렇다면 이곳은 그의 신전인가? 복잡한 심경이었다.
[시륜.]
...조금 싸가지없었나?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문장을 생각하던 도중, 그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재촉했기 때문이다. 내가 싸가지없었다면, 그건 너의 싸가지가 옮았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책임을 그에게로 돌리며, 물에 젖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시륜]이라. 너는 이곳의 신이 아니구나.”
호루스가 슬쩍 손짓하니, 내 옷가지와 머리카락이 모두 뽀송뽀송하게 말랐다. 이런 능력이 있었으면 진작 말려줄 것이지…. 조금 원망하게 되었다. 호루스는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이곳의 신이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아무 생각 없이 반말하다가 뒤늦게야 붙인 존대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연꽃에서 태어나 신으로서의 사명을 잇는다. 우리가 태어날 즈음, 꽃은 호수의 가장자리로 흘러와 개화하지.”
그래, 여기까진 설정한 그대로였다. 신들은 분홍색 연꽃에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태어나고, 신의 영역에서 성장한 뒤 인간계로 내려온다. 오직 어른의 모습으로만 인간을 돌보는 것, 그게 신이었다. …잠깐만. 잘 보진 못했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검은색 연꽃이지 않았나? 심지어 호수의 중앙에서 성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너도 눈치챈 것 같군. 네가 있던 연꽃은 호수의 한가운데에서 피어났다. 별 징조도 없이 갑작스레 피어났지.”
그는 성가시게 되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빛의 연꽃에서 태어났다. 고대의 신은 어떨지 몰라도, 이후에는 모두 같은 크기와 같은 빛깔을 가지고 태어났지. 능력이 강하건 약하건 탄생은 모두 동일했다. 허나 너는 달라. 검은색 연꽃에서 태어난 돌연변이. 우리는 그 꽃이 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이전부터 존재했고, 그 어떤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까마득한 먼 옛날부터 존재한 검은색 연꽃, 그리고 그곳에서 태어난 나. 누가 보아도 수상한 탄생이긴 했다. 신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 것도 이해된다. 하지만 저들보다도 더 오래된 연꽃이라니. 어쩌면 내가 본 그 장면들은 현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주의 탄생이라던지, 지구의 역사라던지 하는 것들 말이다.
[호루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그래, 중요한 건 이거다. 저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설마하니 내가 수상하다는 이유로 내쫓지는 않을 것이고…. 요주의 인물이니 곁에 두고 살펴보아야 한다는 결론이지 않을까?
“나는 네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내가 그렇다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겠지.”
잠깐만요.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모두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 어쩐지 묘하게 설명이 겉돈다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들리는 것은 괴상한 언어였지만, 누군가가 통역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머릿속으로는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호루스도 비슷한 방식으로 내 말을 이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 그렇지 않은가. 대부분의 차원 이동물에서는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니까. 여기서도 비슷한 메커니즘일 것이라 생각했다.
“너는 나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 말이 맞다면 고개를 끄덕여라.”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조인 것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의사를 전달하는 것은 중요할 것 같았다.
“기이하군. 일방향의 소통이 가능한 이유가 있을 터. 흐름의 뜻을 이해하려면 네가 성장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때까진 지켜보지.”
흐름이라는 건 운명과 같은 말일까? 그가 쓰는 용어와 내가 서술했던 용어가 동일하다면, 아마 그러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언어 패치가 덜 된 이유는 알 수 없는 운명 때문이고, 이 운명을 파악하려면 내가 성장해야 했다. 그런데 성장이라니.
[저는 이게 다 큰 상태인데요? 정신적 성장을 말하는 건가? 아냐, 내 글에서는 성인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성장이라 했어. 그러니까 나는 호루스가 말한 ‘성장’이 불가능해.]
혼란에 빠진 상태로 이것저것 중얼거리고 있으니, 호루스는 내 말의 분위기를 파악해보려는 듯 눈매를 좁혔다.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내 반응을 살피는 것 같았다.
“내가 말했던 것 중 잘못된 것이라도 있나? 일방향의 소통, 흐름, 성장…. 그렇군. 성장에 문제라도 있는 모양이지.”
탄생부터 다른 존재였으니 성장하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나. 호루스는 알아서 수긍하는 듯했다.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최대한 의사를 전하려 했다.
[저는 이미 성장이 끝났고, 이젠 노화할 일만 남았어요. 아, 물론 이게 인간의 몸일 때의 이야기지만…. 아무튼. 더 클 수는 없어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입을 열었다. 그는 눈치가 빠른 편인 것 같았으니, 어조 정도라도 파악할 수 있도록 말이다. 약간의 몸짓과 함께 말하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성장할 수 없는 존재인가 보군. 확실히 막 태어난 이들보다는 성숙한 모습이다. 우리에 비하면 어리게 보이기에 더 성장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건만, 틀린 판단이었나.”
꽤 빠르게 이해한 것을 보며 놀랐다. 이리 복잡한 설명은 최소한 1시간은 있어야 눈치챌 것이라 생각했는데. 호루스의 눈치는 상상 이상인 것 같다.
“이해했다. 네 성장이 불가능하다면 흐름의 뜻을 파악하기도 어렵겠지. 허면 어찌할 것이냐. 나는 너를 계속 지켜볼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을 돌보아야 하는 몸. 너를 위해 시간을 내기는 어렵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 막 차원 이동한, 이제 막 신화시대에 떨어진 평범한 인간이 무슨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신들과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이집트의 다른 인간들과도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완벽히 고립된 상태이지 않은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아무런 정보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체 무엇을 결정해야 할까.
[솔직히 저는 아무 의견도 생각나지 않아요. 아무것도 모르겠다고요. 그저 디레를 보고 싶을 뿐인데, 아, 디레. 혹시 디레는 태어났나요?]
디레요, 디레. 나는 그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같은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볼 수 있었다.
“[디레]? 누구의 이름인가? 우리 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 그러고 보니 기원전의 디레는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없고, 일부러 설정조차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다만 확실한 건 그의 이름에 ‘샤’가 들어간다는 것. 이것만은 확실했다.
[샤, 샤. 저기 있는 열매처럼 붉은 눈을 가졌고, 머리카락은 제 머리카락과 이 바닥의 색을 합친 것 같이 생겼어요.]
어떻게든 설명을 해보려 손짓했다. 호루스의 뒤편에 있는 과일과 내 눈동자를 번갈아 가리켰고, 내 검은색 머리카락과 바닥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눈동자가 붉고, 머리카락은 하얀…. 아닌가? 검은색과 하얀색을 뒤섞은 것 같은, 회색 말이군. 회색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자는 없다.”
붉은 눈동자라, 불길하군. 그는 치가 떨린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디레는 나름 귀염받고 자랐는데, 정작 그가 가진 눈동자 색은 불길하다니. 설정 오류인가?
[붉은색이 왜 불길해요?]
“적색이 불길한 이유를 모르는 건가? 고대에 있던 일이다. 붉게 타오르는 뱀은 태양을 비롯하여 세상을 집어삼키려 했지. 나 이전의 태양신은 뱀과 맞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때 입은 상처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적색은 악의 상징으로 여겨지지.”
의아해하는 표정을 빠르게 눈치챈 그는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적안을 가진 뱀 아펩이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고, 그 뒤로는 적색이 악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 하지만 그렇다면, 신 중에는 적색 눈동자나 머리카락을 가진 자가 없다는 뜻인가?
“무얼 궁금해하는 건지 알 것 같군. 우리 중에는 적색을 소유한 자가 없다. 그 누구도 적색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일 그런 자가 태어난다면, 필시 악의 운명을 타고났을 터.”
그런 존재는 즉각 처분할 대상이다. 덧붙인 말에 나는 기겁하고 말았다. 처분이라니. 이 세계는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디레가 태어난다 해도 바로 죽을 수 있다는 뜻이지 않은가. 게다가 그 망할 운명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길래, 아직 악한 행동을 하지 않은 자조차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 그저 아펩이 잘못된 선례를 남겼을 뿐, 다른 자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너도 이해할 것이다. 하나의 운명보다는 전체의 존속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여라.”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같은 발언은 언제나 짜증 나는 논제이지 않은가. 소수를 택하면 다수를 버리는 잔인한 자라고 비난받고, 그렇다고 다수를 택하면 이기적이라며 비난받는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소수를 택하고 싶은 편이었고, 이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소수를 버리고 얻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라고 할 수 없지 않나.
게다가 나는 디레를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호루스가 말한 소수에는 디레가 포함되어 있는데, 어떻게 디레를 버릴 수 있을까. 악일지도 모른다는 해괴한 판단 때문에 디레를 버릴 바에는 세상이 멸망해버리는 게 낫다. 물론 디레가 세상을 망하게 할 리도 없지만 말이다. 오히려 디레라면 선에 포함되지 않을까. 그는 빛이고 희망이니까.
“수긍하지 않는 표정이군. 뭐, 상관없나.”
호루스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그는 나에게 커다란 지팡이를 하나 건넸다. 온통 황금색에, 새의 두상처럼 조각된 손잡이까지. 새의 눈동자에는 푸른 보석이 박혀있어 상당히 비싸 보이는 지팡이였다.
“나의 성물 중 하나이다. 네 곁에 머물 자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너를 보호하며 지킬 것이니, 항상 들고 다녀라.”
[알았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를 품에 끌어왔다. 호루스의 몸집을 기준으로 만든 것인지 무척 두껍고 길었다. 나의 목까지 올라오는 길이인 것을 보며, 호루스는 미세하게 웃은 것 같기도 하다. 입가가 부드럽게 풀리니 꽤 잘생겼다는 소감이 들었지만,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