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의 신과 괴물
키워드: 차원이동+무한회귀+영혼분산(?)
나는 A라는 세계의 평범한 신으로 태어나 평온한 일상을 보냈어. 그러던 어느 날, B 세계로 영혼의 일부가 떨어졌어. B세계에는 아주 아름다운, 회색빛의 거대한 신이 있었어. 그 신은 세계가 엄격한 규율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고, 인간의 희노애락은 불필요한 것이라 여겼어. 인간을 최대한 통제하려 했기에, 그 세계는 괴로움으로 가득했고, 회색빛으로 가득했어.
나는 그 회색빛의 세계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물론 회색빛의 신은 아름다웠고, 다른 세계 신의 신념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그 세계의 인간이 가여웠고, 감정을 통제하는 그 차가운 신이 가여웠어. 그 신에게도 따스함을 알려주고 싶었어. 그렇게 나는, 내 영혼의 일부는 그 차가운 신의 곁에 머물며 애정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는데... 그게 그 신에게 괴로움이 될 줄은 차마 몰랐어. 내 영혼의 일부가 다시 본래의 나에게, A세계의 나에게 돌아올 줄도 몰랐고.
내가 사라지자, 그 신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한 감정에 시달렸어. 부모뿐일까, 그는 그의 유일한 친구, 유일한 연인, 유일한 반려, 유일하게 동등한 상대를 잃은 거였지. 그럼에도 B세계를 원래의 차가운 모습으로 돌려놓지는 않았어. 그는 내가 가르친 대로, 내가 원한 대로 세계를 따스하게 유지하려 했지. 그러나 그 신은 괴로운 감정을 버리지 못했어. 괴로움을 해소하는 법 같은 건 배우지 못했거든.
그 괴로움은 세계 어딘가에 괴물들을 낳았어. 인간을 세뇌하고, 유혹하고, 혼란스럽게 만들며, 이내 신의 자리까지 탐하는 괴물들을 말이야. 어찌 보면 악마라고도 부를 수 있겠지만, 그것들을 악마라고 부르기엔 악하지 않았어. 그건 그저 괴로움이었어. 고통이었고 절망이었어. 원망, 원통함, 억울함, 외로움, 고독... 그저 그런 감정의 집합체였지. 그들도 따스한 세계를 원했을 뿐이었어. 신이 바라는 것처럼, 자신들에게 애정을 가르쳐줄 영혼을 바라는 거였지.
그 괴물들은 온갖 시도 끝에 A세계의 나를 불러냈어. 내 모든 영혼을 불러내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우연히 B세계로 떨어졌던 나의 영혼의 일부와 비교한다면, 그보다도 작은 크기였지만. 어찌되었건 그들이 찾는, B세계의 신이 찾는 영혼의 일부를 불러내는데 성공했지.
우연히 불려온 나는 굉장히 당황스러웠어. 새롭게 분리된 나에게는 B세계의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신의 힘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거든. 그러니까, 나는 그저 차가운 신과 괴물들이 노리는, 따스하지만 아무 능력도 없는, 인간에 가까운 존재가 된 거야. 어찌되었건 신의 영혼이니 인간처럼 괴물에게 홀릴 일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위험했어. 인간이 본능적으로 외면하는 수많은 것들을, 나는 맨정신으로 보고 경험해야 했으니까. 인간의 정신력과 비슷한 수준으로,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걸 겪어야 했으니까.
B세계의 신은 내 영혼의 일부가 떨어진 즉시 나를 찾아나섰고, 나를 발견해냈지만, 나를 직접적으로 도울 수는 없었어. 그는 그 괴물들에, 그 괴로움에 직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거든. 그는 결국 자신의 영혼도 일부 뜯어내어, 인간에 가깝지만 결코 인간은 아닌 존재를 만들어냈어. 그게 세트였지. 세트와 합류하기 전까지, 나는 굉장히 힘든 날을 보내고 있었어. 괴물에게 붙잡히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지. 전투? 그런 건 바랄 수도 없었어.
하지만 세트와 합류한 뒤 상황이 바뀌었어. 세트는 괴물에 맞설 수 있었고, 싸울 수 있었고, 나를 지킬 수 있었어. 세트가 괴물과 싸우는 동안, 나는 그 괴물을 없앨 단서를 찾고, 그 단서로 괴물의 근원을 없애기만 하면 됐지. 더 이상 도망만 칠 필요는 없었어. 그는 나에게 어느 정도의 시간을 벌어주었고, 그 시간은 결코 충분하진 않았지만, 아슬아슬하게 괴물의 근원을 없앨 수는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장면들 중 바로 이 장면이 있었어... 계속되는 전투에 몸이 너덜너덜해졌으면서도 내가 걱정할까 봐 멀쩡한 척하고, 도리어 날 걱정하는 세트 말이야...... 그 덕분에 괴물의 근원을 찾아 없앨 수 있었지만, 그가 결국 죽어버릴까 봐 무서웠어. 이제 내 두려움은 괴물이 아니라 세트를 향해 있었지. 그리고 그건 괴물을 없애는데 굉장히 큰 영향을 주었어.
날이 갈수록 세트의 몸엔 상처가 늘어갔어. 내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는데, 그의 몸은 온갖 낫지 않은 상처로 가득했어. 나는 죄책감이 들었어. 나 때문에 그가 다쳤다는 죄책감. 이를 눈치챈 그는 자신의 선택이라고, 자신의 신념이라고, 그렇게 말했지만. 내가 그런 감정을 갖는 게 오히려 자신의 선택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어디 감정이 쉽게 사라지겠어? 나는 그에게 고마웠고, 미안했고, 죄스러웠어. 그러니까 나는, 무척이나 괴로웠어.
A세계에 있을 때는 그런 적이 없었지. 괴로움이니 하는 것들은, 가끔 찾아오곤 했어도 금세 사라져버릴 감정이었어. 나는 평범한 신이었고, 평범한 세계에 살았고, 평범한 일생을 살았으니까. 하지만 B세계에 넘어온 뒤로는 모든 것이 바뀌었지. 괴로움은 항상 곁에 있었어. 나는 신도 인간도 아니었고, 괴물이 가득한 세계에 있었고, 인간들처럼 외면하지도 못한 채 모든 걸 겪어야만 했으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내가 B세계의 신과 괴물들에게 공감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어. 괴물을 하나 없앨 때마다 내 영혼이 강해졌고, B세계에서의 기억이 조금씩 돌아왔지만,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었지. 과거의 내가 한 선택을 점차 이해할 수 없게 되었어. 대체 왜 B세계를 바꾸려 한 걸까? 언젠가 떠날 이방인이, 고작 그 가벼운 연민 때문에, 한 세계를, 한 신을 뒤바꾸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어. 고작 그 연민 때문에, 자신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거였잖아.
인간의 감정이 통제받고 모든 행동이 엄격한 규율 아래 이뤄지는 것과, 괴물들에게 유혹당하고 혼란에 빠진 채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속에 살며 이용당하는 것. 둘 중 어느 게 더 나았을까? 나는 어느 게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어. 한 세계는 그 세계의 신에게 달린 것이지, 곧 떠날 이방인에게 달려서는 안 되었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했지.
나는 B세계의 신에게 미안했어. 과거의 내가 그를 망쳐버린 것만 같았지. 차갑기는 해도 그 아름답고 완성된 존재와도 같던 신을, 갈기갈기 찢긴 영혼으로 끌어내린 것만 같았어. 과거의 나는 그에게 따스함을 가르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고통을 가르치고 만 거야. 나는, 비록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다른 존재라고는 해도, 우리는 하나의 영혼에서 떨어져 나온 존재였으니. 나는 그 결과에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어.
그런 나에게 세트는 '하나의 영혼에서 분리되었다고 해도, 각 영혼의 행동은 각 영혼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해주었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 이런 사태를 만들어낸 '나'는 이곳에 없고, 이런 사태를 만들어내지 않은 나만이 이곳에 있다면. 그 누구라도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이것을 책임질 존재는 나밖에 없는 거니까.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그 모든 괴로움을 안고 계속해 괴물을 없앴어. 나의 영혼이 커질수록, 기억이 돌아올수록. 내가 강해질수록 내 마음은 약해졌어. 세트가 곁을 지켜주지 않았다면, 나는 괴물에게 홀려 모든 것을 저버린 최초의 신이 되었을지도 몰라.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세트에게 감정을 품게 되는 건 필연이었어. 과거의 내가 B세계의 신에게 품었던 감정과는 달랐어. 그것보다는 무겁고, 진득하며, 온몸을 내달리는 듯한 감정이었지. 그러니까 그건 사랑이었어. B세계의 신이 과거 나에게 갈구했던, 그가 나에게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을, 지금의 내가 B세계 신의 조각에게 느끼게 된 거야. 이 여정이 끝나고 나면 B세계 신에게 회수될지도 모르는 그 조각에게. 내가. 사랑을.
그 사랑은 따스하지 않았어. 그건 괴로웠어. 내 영혼을 끌어안는 듯하면서도 나를 찢어내는 것이었어. B세계의 신도 이만큼 고통스러웠을까, 아니 이것보다도 고통스러웠겠지. 그러니 그런 괴물이 만들어진 거겠지. 나는 그리 생각하며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품으려 애썼어. 이 괴로움을 티내봐야, B세계의 신에게도 세트에게도 좋을 게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사실상 내가 괴로움을 배우는 여정이었어. 과거의 내가 B세계에, B세계의 신에게 따스함을 가르쳐주려 했으나 괴로움을 남기고 떠난 것처럼. 나는 B세계로부터, B세계의 신이 만들어낸 괴물들로부터 내가 남긴 괴로움을 배우게 된 거야. 그곳의 난 신이 아닌 그 영혼의 일부에 불과했지만, 신인 나보다도 더 많은 괴로움을 알게 되었고, 괴로움을 누르는 더 많은 방법을 알게 됐어. 그게 B세계의 신이 택한 것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었지. 나는 내가 연민했던 B세계의 신을 닮아가고 있던 걸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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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꿈은 메모 안 해두려 했는데 썰 풀다보니 생각보다 재밌어서 1시간 지남. 이럴 수가. 하지만 제 머릿속에는 아직도 B세계 신이 차가운 눈빛으로 행성을 내려다보던 장면이 생생하고, 세트가 절 걱정하며 포옹하던 장면이 생생합니다. 큰일났어요. 하나는 너무 과하게 아름답고 우주적으로 거대한데, 다른 하나는 너무 과하게 다정하고 인간적으로 거대해요. 이건. 사랑이야.
B세계 신이 진짜진짜 아름다웠었는데 이걸 보여줄 수가 없다니 통탄할 노릇이다. 진짜로 말도 안 되게 아름다웠다고요. 그 회색빛의 신. 진짜로. 숨막힐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