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록의 하해 대표로서
오늘 꿈에서 나는 무명록의 하해 대표가 되어있었음... 하해 대표는 륜이 맞긴 한데 설마 현실의 내가 '그' 륜이 되어서 활동하는 꿈을 꿀 줄은 몰랐다.
무명록의 하해는 다가올 멸망에 대비하여, 이 세계가 다른 세계와 연결되기도 전부터 다른 세계들과 교류하고 그 세계를 도왔음. 멸망이라는 것이 어느 세계에 도달하면, 그 멸망이 포기하고 떠날 때까지 세계가 버틸 수 있도록 온힘을 다했음. 그리고 모든 세계가 연결되었을 때, 조금이라도 혼란이 적도록 각 세계의 수뇌부 혹은 인간 아닌 것들과 모든 합의를 마치려 애썼음.
그런데 내가 그 하해의 대표가 된 거임. 그 막중한 책임을 내가 맡게 된 거임. 꿈속의 나는 '나=하해대표'라는 걸 굉장히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행동했는데, 현실의 내가 돌이켜보면 너무 무서운 일들이 가득했음... 인간을 해치는 것이 가득한 다른 세계에 찾아가서 인간 아닌 것이 부리는 난동을 멈추고 그것을 나에게 감회시키라고? 그것을 내가 만든 세계로 데려와서 제 나름의 새로운 쓰임새를 찾으라고? 너무 무섭잖아. 그런데 꿈속의 나는 그걸 해냄.
꿈에서 깨기 직전의 세계에서, 나는 거대한 빛나는 신라풍 다리를 봤음. 그건 누군가의 분노를 원천으로 하여 다른 사악한 것을 봉인시킬 수 있게 하는 다리였음. 다만, 사악한 것을 봉인하기 전에 분노가 사라지면, 그만한 힘은 시전자에게 되돌아가 시전자를 해한다는 부작용이 있었음. "분노의 사라짐은 그 사람의 완성이다"라는 게 그 다리가 믿는 신념이었는데, 역설적으로 그 분노가 크지 않은 사람이라면 완성되어봤자 불완전한 사람만도 못하다고 여겼음. 그래서 사악한 것 이상의 분노를 가진 자만이 다리를 다룰 수 있었던 거고.
하해의 대표는 자신이 그 다리를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음. 존재 간의 격이 다른 것도 이유였지만, 격을 넘어서도 그것이 요구하는 분노의 수준을 자신이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음. 그는 세계에 얽매이지 않는 신이었고, 스스로 세계를 창조해내는 신이었으니.
게다가 다리가 원하는 '충분히 분노하는 완성된 존재'라는 건, 결국 하해 대표와 같은 존재였거든. 인간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하였고, 그 분노를 모두 해소하였으며, 이제는 분노를 제 통제하에 두어 다스릴 수 있는 존재. 그런 건 하해 대표와 같은 존재들밖에 없었음.
그 다리는, 그걸 알면서도 '인간 중에' 그런 존재가 나오길 바랐음. 인간이 충분히 분노하고 그것을 해소하여 완성된 존재로 거듭나길 바랐음. 그 다리는 수도 없이 많은 인간들이 자신을 이용하다가 부작용으로 죽는 것을 보아왔음에도 여전히 그 소망을 놓치 못했음.
그래서 하해 대표는 그 다리의 소망을, 염원을 돕겠다는 방향으로 다리를 설득하기로 함. 자신의 곁에 있다면 여러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되고, 또 그 수많은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면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될 자질이 있는 인간을 발견하게 되니까. 초월자가 될 인간이 그 세계의 멸망을 막을 때, 이 다리가 존재한다면 꽤나 도움될 것이라 여겼음.
다리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직접 다리와 연결되어야 했음. 다리를 이용하되, 무언가 사악한 것을 봉인하지는 않는 그 모호한 상태를 유지해야 했음. 하해 대표는 다리와 자신의 정신체를 연결했고, 다리의 기억을 보았으며, 마침내 다리의 감정을 이해하게 됨. 그 다리가 인간의 완성을 바라는 이유도 알게 됨.
그 순간, 하해 대표는 부작용을 감수하고 다리와의 연결을 끊음. 다리의 기억과 감정을 더 엿보는 것은 자신에게도 다리에게도 좋지 않다고 판단했음. 그 부작용으로 하해 대표는 약간의 내상을 입었지만, 하루면 나을 수준이라 괜찮다고 생각했음.
하지만 대표의 곁에 있던 세트는 그를 걱정하며 부축했음. 대표가 얼마나 두려움이 많고 연약한 존재인지 알기 때문이었음. 그리고 그걸 보는 다리도 대표를 걱정하기 시작함. '하해는 강하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연결이 완전히 끊기기 직전, 다리의 생각을 들은 하해 대표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음.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세트를 비롯한 일부 신들뿐이었는데, 고작해야 '자아가 깃든 다리'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거임. 그 다리는 자기 자신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는데도.
굉장히 어이없는 순간이었지만, 어쨌든 그 다리는 하해와 함께하겠다고 결심했으니, 하해 대표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마음으로 세트의 부축을 받은 채 자리를 떠남. 어이없는 것과는 별개로 세트의 걱정을 받고 약한 존재로서 기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거든. 세트에게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건, 그리고 보호대상 이상의 소중한 존재로 여겨지는 건, 륜이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던 이유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