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메모

호롱새와의 계약이 끊길지라도

951자

평화롭던 세계가 갑작스런 지진과 함께 붕괴하기 시작. 갈라진 땅의 틈에선 괴물들이 쏟아져 나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곳이 원래부터 판타지 세계인지라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도 많고, 수인 같은 타종족도 많아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는 점임.

 

나는 굳이 따지면 정령사 내지는 테이머에 가까웠는데, 호롱새-갈색 몸체과 푸른 날개를 가진 새 외형의 정령-라 불리는 정령들과 계약한 상태였음. 다른 정령이나 동물과도 교류하긴 했지만, 나에게 가장 익숙하고 나에게 가장 잘 맞춰주는 건 호롱새였음. 격변의 날에도 이 호롱새와 함께 사람들을 대피시켰고, 그 이후에도 언제나 호롱새와 함께였음.

 

그러던 어느 날, 2차 격변이 찾아옴. 이번에도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겠거니 했는데... 이번에 나온 건 그저 그런 괴물이 아니었음.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드는 아귀와도 같은 무언가였음. 그것에게는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은 반면, 우리는 그것의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그것의 뱃속으로 떨어질 수 있었음.

 

모든 동물과 정령은 그것을 피해 달아났음. 자신의 서식지도 버리고, 자신의 계약자도 버리고, 오직 생존을 위해 달아났음. 서식지와 계약자를 지키려던 것들은 이미 아귀에게 먹힌 지 오래였음. 나도 호롱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 나는 호롱새가 계약자를 버리고 떠난다는 죄책감을 갖지 않길 바랐고, 호롱새와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끊음. 그렇게 하면 계약이 끊긴 것에 대한 모든 대가는 내가 짊어지게 되니까. 호롱새는 자유롭게 도망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호롱새는, 계약에서 자유로워진 그 호롱새는 도망치지 않았음. 더 이상 내 곁에 있을 이유가 없음에도 내 주변을 맴돌며 내가 그를 필요로 할 때마다 나타나길 반복했음. 근처에 아귀가 있다 해도 그의 행동은 같았음. 서로가 서로를 잃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계약이 없는 때에도 같았음.

 

(원랜 진짜로 평화로운 판타지물이었는데 새벽에 천둥번개 친 뒤로 갑자기 평화가 다 깨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