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 왕국의 왕자는 게이트를 닫는다
배경은 현대 한국인데 이제 수인 왕국과 현판 속 몬스터가 섞인 무언가...(?) 나는 수인 왕국의 셋째 왕자였고, 아마 개였던 것 같아. 그런데 이런저런 비설 때문에 동물보다 급이 높은 생물의 피가 섞인..? 굳이 비유하자면 개와 해태가 섞인 느낌? 진짜 해태는 아니었지만.
내 보좌로는 늑대가 있었는데, 키가 크고 날씬했어. 내가 남들의 눈에 띄는 짓을 할 때마다 그러시면 안 된다고 말리면서도 도와주는 역할이었어. 나는 항상 왕자임을 숨기고, 다른 생물의 피를 숨긴 채 평범한 개 수인인 척했단 말이야.
그런데 불의한 일을 보면 못 참고 나서는 바람에, 주변에서는 쟤 진짜 개 맞냐고 술렁이는 게 일상이었어. 내 보좌 늑대는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가 끄응 소리를 내며 주변을 정리하는 게 일상이었고.
아마 난 왕실과 연을 끊으려 했던 것 같아. 적자이긴 했지만, 왕은 항상 후실이 낳은 아들만을 예뻐했고, 나는 어릴 적부터 창고에 갇혀 사는 신세였거든. 당연히 다른 형제들도 날 무시했고, 신하들은 내 존재조차 모르는 상황이었지.
왕은 아마도 날 불길하게 여겼던 것 같아. 자신의 훌륭한 혈통에서 야생성 하나 없는 개 따위가 태어났다며 혐오했고, 한편으로는 왕실 주술사가 말했던 것처럼 내가 특이한 형질을 발현해서 자신을 죽일까 걱정했지. 난 이미 그 특이한 형질을 발현한 지 오래인데도 말이야.
어쨌든, 나는 그런 한심한 환경 속에서 살며 밖을 전전했어. 왕실 내부가 왕의 것이라면, 그 바깥에 있는 것들은 전부 내가 먹어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떠돌았지. 왕은 내가 자신의 감시에서 벗어난 것을 알아채고 무척 불안해하며 기사단을 풀었지만, 그가 모르는 게 있었어.
나에겐 그보다 우월한 기사단이 있다는 것. 나는 밖을 떠돌며 신분 상관없이 뛰어나 보이는 인재를 발견하면 곧바로 친해지려 했고, 그렇게 그를 내 기사단 내지는 동료로 만들었어. 그들은 내 정체를 완전히는 모르는 상태였지만, 꽤 높은 신분이라는 걸 알면서도 편하게 대해줬어.
격의없이 어울리는 것이 이미 습관이 된 상태였거든. 그들은 언제나 왕실의 기사단에게서 날 숨겨주었고, 나는 편한 마음으로 살 수 있었어. 물론 가끔은 가볍게 복수하려고 왕실에 숨어들어가 자잘한 보물을 훔쳐오기도 했지만.
사실 내 동료들이 없었더라도, 내 몸 하나 숨기는 데는 이골이 나있었어.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그들이 없을 적에도 기사단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는걸. 그러니 그들을 모은 건 그저 외로움 때문이었을 거야. 혼자 지내는 건 외로우니까.
그렇게 편안한 일상을 보내던 중 커다란 게이트가 터졌어. 파견된 기사단이 전멸하는 사태가 벌어졌지. 왕은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야생성 강한 아들들을 보냈지만, 그들도 게이트에서 겨우 살아돌아오는 수준이었어. 왕실은 통제를 잃었고, 민간은 술렁였어.
나는 고민했어. 내 특이 형질을 이용한다면 나와 내 동료들이 게이트를 닫을 수 있지만, 내 정체는 더이상 숨길 수 없게 되니까 말이야. 남들 몰래 사람을 구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대놓고 나서는 건 꺼려졌어.
내 동료들도 그걸 알고 있었고, 자기들끼리 몰래 게이트를 닫고 오겠다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어. 나는 실없이 웃으며 항복했지. 그래, 내 안위도 중요하지만 역시 사람들을 구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내 보좌관도 고개를 끄덕였어. 파장은 자신이 잠재울테니 다녀오라고.
그걸 위해 자신이 있는 거라고 말했지. 나는 그에게 말했어. 네가 있기에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거라고. 언제나 고맙다고. 그는 답지 않게 감동받은 눈치였어. 그래서 난 장난을 좀 쳤지.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역시 나랑 결혼하지 않겠냐고 말했고, 그는 질색하며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어.
나는 웃으며, 너는 그 표정이 제일 잘 어울린다고 말했지. 우리는 큰 긴장감 없이 서로의 전장에 섰어. 그는 게이트 밖, 나와 다른 동료들은 게이트 안. 우리는 서로를 믿었기에 망설임없이 행동할 수 있었어.
게이트 안은 황폐했어. 그 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기괴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고, 그것들은 다른 몬스터와 다를 바 없이 우리를 공격했어. 확실히 강하긴 했지만, 아직은 기사단이 전멸할 수준이라 생각되진 않았어. 꽤나 수월히 모든 몬스터들을 무찔렀지만, 게이트는 소멸하지 않았어.
우리는 의아해하며 게이트 내부를 살펴보았고, 땅에 반쯤 묻혀있던 제단을 발견했어. 동료들은 그곳에 적힌 글을 읽을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언어를 알고 있었어. 아주 어릴 적, 특이 형질을 발현할 때 보였던 환각과 같은 언어였거든.
그것을 한 번 훑어보니, 이전의 기사단이 왜 전멸했는지 알게 되었어. 그건 수인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제단이었어. 수인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나 또는 특이 형질을 가진 수인만이 접촉할 수 있는 제단이었지.
나는 동료들을 물린 뒤, 그 제단에 적힌대로 행동했어. 제단에 피를 떨어트리고, 해가 지는 방향을 향해 피를 뿌리고, 다시 제단에 피를 떨어트렸지. 그리고는 주문을 외웠어. 현시대에 있는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야말로 본능에나 새겨진 주문을 외웠지.
그렇게 나는 특이 형질에 대한 단서를 얻었어. 이 형질이 본래 누구의 것이었는지, 어떻게 해서 나에게 섞여들어온 것인지 알게 되었어. 그 단서는 마치 뇌 속으로 직접 들어오는 것 같았어. 특이 형질을 발현하던 때처럼 말이야. 그리고 그곳에서 내 동료들은 내 정체를 알게 되었지.
어쨌거나 게이트는 소멸했고, 나와 내 동료들은 서둘러 떠났어. 다른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은신처로 돌아가야만 했지. 은신처로 가던 중 민중을 통제하려는 왕실의 기사단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우리는 특유의 방법으로 그들을 따돌렸어.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을 본 민중 사이에 소문이 퍼졌어. 왕실조차 포기한 게이트를 닫고 다니는 영웅들이 있다, 왕실은 그들을 잡아 죽이려 한다 등. 왕실은 그 소문을 퍼뜨린 이들을 잡아들였지만, 그럴수록 소문에 불이 붙었지.
사실 그 영웅들은 왕실에게 탄압받아 숨어지내고 있다, 그 영웅들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왕실이 잡아가더라, 왕실은 무척 중요한 것을 숨기고 있다, 영웅들을 지켜야 한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어.
나와 내 동료들은 그걸 들으며 웃었지. 사실 틀린 말은 없었거든. 내가 붙잡힌다면 왕에 의해 죽을 것이 분명했고, 내 동료들 역시 날 숨겨주었다는 죄목으로 처벌받을 것이 분명했잖아. 우리는 유쾌히 웃으며, 왕실로 잡혀간 사람들을 구할 작전을 세웠어.
나는 왕실의 보물을 여러 번 털며 노하우가 쌓인 상태였고, 그 노하우를 동료들에게 전수할 수 있었어. 동료들은 눈을 반짝이며 훈련했어. 그리고 대망의 작전 날, 일부 동료들은 게이트를 닫아 눈길을 끌었어. 대부분의 기사단이 그들을 쫓았지.
그리고 남은 동료들과 나는 왕실로 숨어들어갔어. 몇몇 동료들은 남아있는 기사단을 유인했고, 나머지 인원은 모두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향했어. 다행히도 그들은 조금 초췌해진 것 빼고는 모두 무사했어. 우리는 감옥을 지키던 이들을 기절시킨 뒤, 그들을 구출했어.
그들이 왕실 밖으로 빠져나갈 때까지 다른 기사단은 보이지도 않았어. 다른 동료들이 열심히 유인하고 있다는 뜻이었고, 내가 밝혀낸 비밀 통로는 왕조차 모른다는 것이 확실해진 순간이었지. 물론 이제는 내 동료들과 저 백성들이 알게 되었으니, 비밀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렇게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뒤, 우리는 다시 은신처에서 모였어. 허탕을 친 기사단이 왕에게 깨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으며, 기쁜 마음으로 훈련했지.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또다시 큰 게이트가 터졌고, 우리는 그것을 닫는 과정에서 기사단을 마주쳤어.
하지만 그들과 싸우진 않았어. 기사단은 왕에 대한 충성이 흔들린 상태였고, 내가 드러낸 특이 형질을 보며 혼란에 빠져버렸거든. 우리가 게이트를 닫을 때쯤, 그들은 나에게 충성을 맹세했어. 내가 보인 능력은 신의 것이라며, 나를 숭배하려들기까지 했지.
충성은 받겠지만 숭배는 하지 말라고 전한 뒤, 그들을 다시 왕실로 돌려보낼지 말지를 고민했어. 그들은 너무 멀쩡했고, 저 상태로 돌아간다면 왕의 의심을 살 게 분명했거든. 그들은 스스로에게 상처입히려 했지만, 그런 건 보고 싶지 않아서 말렸어.
우리가 고민하는 사이 게이트는 완전히 닫혔고, 내 보좌가 찾아왔어. 그는 기사단을 보고 잠시 놀랐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한 뒤 조언했어.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말이야. 이유를 물으니, 그것이 왕에게 가장 큰 타격이 될 수 있다고 답하더라.
그들을 무사히 돌려보내면, 왕은 그들을 의심하겠지만 동시에 왕실의 격을 높이려 들 게 분명했어. 모든 기사단이 무사히 돌아올 정도로 왕실이 강하다고, 저번의 사태를 묻으려 들려 하겠지. 분명 어떤 백성들은 그 말에 홀릴 것이고, 금방 영웅을 잊을지도 몰랐어.
하지만 그들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왕실은 또다시 타격을 입겠지. 비록 게이트는 닫혔지만 기사단은 전멸했고, 심지어 그 게이트를 누가 닫았는지는 불확실한 상황이니까. 영웅담에 심취한 백성들은 또다시 왕실의 무능함과 영웅의 위대함을 비교할 것이고, 우리가 활동하기 더 편해질 거였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 기사단을 수용할 장소가 있는지 물었고, 보좌는 빠르게 후보군을 내세웠어. 우리는 이 기사단을 그곳으로 보냈고, 우리도 역시 은신처로 돌아갔어. 그리고 보좌의 생각대로 왕실은 더 무너져내렸지.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어. 왕실의 기사단은 하나둘 우리의 편이 되었고, 민중은 우리를 영웅으로 추앙했지. 어리석은 왕은 계속해 소문을 잠재우려 했고, 사람들을 잡아들였지만, 그에도 한계가 있었어. 백성의 원성, 기사단의 불만이 가득했어. 심지어는 왕의 신하들조차도 망명할 낌새를 보였지.
왕은 권위를 잃었고, 각 지역에서는 봉기가 일어났어. 왕은 그것을 반란이라 말하며 제압하려 했지만, 기사단은 그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어. 오히려 그곳에 있던 우리의 기사단에게 설득당해, 우리의 편이 되기 일쑤였지. 우리는 왕실 세력을 갉아먹었어. 이제 우리의 세력이 더 커졌지.
우리는 반란을 일으켰어. 왕을 끌어내리고, 왕실을 무너뜨렸어. 그 누구도 왕을 지키지 않았고, 그 누구도 우리를 막지 않았어. 왕이 그토록 아끼던 것들은 모두 무너졌지. 백성들은 환호했고, 우리는 승리했어.
내 동료들은 새 나라를 세우자고 말했어. 나를 왕으로 삼고, 자신들은 신하가 되겠다고 말했지. 하지만 난 반대했어. 나는 왕이 될 재목도 아닐 뿐더러, 만약 내가 왕이 된다 해도 내 후손이 똑같은 짓을 벌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우린 왕 없는 나라를 세웠어. 모든 것을 새로 만들었지.